시인(詩人)은 세계를 감각하는 자이다. 시인 자신의 고유한 감각을 통해 외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서로 아무 관련 없는 내용들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내용적인 연속은 시인의 감각이 어떤 내적 연관성을 예견하거나 그것을 가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타당성을 본능적으로 포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인의 감각은 일종의 심리적 토대인데, 시인은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세계에 귀속될 수 있는 존재로 자리한다. 관념의 추상을 넘어 통합적 세계 속에 감추어진 근거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대상 지평 안에 세계를 수용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도 생략해버리며, ‘나’에게서 세계로 넘어가는 현실적 연결점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 삶의 진실은 장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보편적 인과성이나 존재론적 근거를 훼손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각각의 입장에서 자신의 회의 속에 고립되어 있는 결과를 승인해주거나 분열을 통해 설명할 수 없게 된 설명 불가능성을 시인의 감각으로 승인해주며 세계를 이해시켜 준다. 외적 규칙성을 초월하여 해명할 수 없는 어떤 본래적인 것의 타당한 근거를 관념적으로 초월해내는 것이다.
     
   
기원전의 나를 해독하는 일은
오래 살아온 동굴의 벽화를 해독하는 일
지린내 풍기는 삶의 벽에 굵은 나무 하나 그려 넣고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
노오란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오는 일
심장 따뜻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
붉은 웃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일회성 삶의 지린내를 맡으며 오늘밤의 포만으로
다시 기원후의 삶을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은
기원전 내 모습이 핏빛으로 물드는 일
퇴근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
은행을 밟은 채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난감함
벽화에 다시 핏빛 노을이 번질 때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는 가장의 뒷모습
지린 은행처럼 창밖에는 사냥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기원전의 생을 기억하는 일은 다시
맨손으로 익은 은행을 주무르는 일
화석이 된 가장의 일과를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어제의 포만을 기억하는 가족들의 흐뭇한 얼굴을 추억하는 일
은행나무 아래를 조심스레 걸어서 만원버스를 타는 일
기원전 내 생의 벽화가 희미해가는 일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후의 나를 추억하는 일
- 변종태 「은행나무 아래서」전문
        
      
위 시에서 시인은 현실의 주체로서 자기 존재를 유보하고 환상으로 채색된 심연과도 같은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로 몰입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세계 속으로 우리가 이미 던져져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반성하여 알기 이전에 이미 언제나 하나의 세계 속에 들어선 채로 머물고, 이러한 사실은 불안과 같은 일정한 기분 속에서 뒤늦게 알려진다고 주장했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시인은 가을의 풍경 속에서 인간의 근원을 궁리하면서 현대성의 필연적 산물과 맞닥뜨린다. 불안과 좌절, 출구 없음 등의 내면화된 생의 국면들을 운명적으로 감내하는, 새로운 차원의 내면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풍경은 “퇴근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은행을 밟은 채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난감함"으로 응집된다. 현실과 전생, 혹은 기원후와 기원전의 경계의 틈은 시적 주체의 틈이자 균열이며, 언어로 정립되지 않는 또 다른 은유의 현장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런 기원전의 근원적 공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시인은 자기의식의 바깥을 시의 현실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은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지만 정작 “사냥감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현실을 통해 기원전 풍경을 시의 영역으로 확장하시고 있다. 이때 기원전의 삶의 모습과 기원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병행되고, 시인만의 고유한 언어적 촉감으로 보이지 않는 관념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현실로 환원한다. 기원전의 ‘일회성 삶’과 수천 년이 지난 기원후의 ‘일회성 삶’의 차이는 무엇인지, 시인은 궁리에 빠진다.
       
시인은 인간의 윤회적 삶이 광활한 지평의 잠재적인 기능태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자신의 시적 감수성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결국 “기원전의 나를 해독하는 일"은 인간의 논리 이전의 아득한 공간을 짐작하는 일이며, 기원전과 기원후의 ‘나’가 근원적으로 지닌, 주체와 세계 사이의 틈새를 언어로 메우려는 일이다. 세계와 인간의 틈새에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에서 세계와 주체가 태어나는 일임도 시인은 잊지 않고 있다.
  
시인은 고약한 뒤틀림이나 잠재적인 폭력을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지 않는다. 그저 기원전과 기원후의 틈새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가장’ 으로서의 역할과 몫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와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기원전 가장의 모습과 “가족들의 흐뭇한 얼굴을 추억하"며, “은행나무 아래를 조심스레 걸어서 만원버스를 타는 일"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고 있다. ‘은행나무’는 고생대부터 수억 년을 생존해온 수종으로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시에서 ‘은행’은 일상적인 영역을 넘어 근원적인 것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더불어 자기 근원과 윤회적 삶의 기원에 대한 피투성(被投性)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은행나무 아래서」의 피투성은 인간의 유한성 혹은 수동성을 의미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존재에 대한 의문이 시인 스스로 기획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로 내던져져 있다는 시인의 존재론적 인식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선명하게 환원되는 기원전 경험 영역과 교차하여, 현실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인의 언어는 기원전과 기원후의 경계를 자각적으로 지워내고 있다는 점도 귀하게 여겨진다.
   
   
자신에게 사로잡힌 풀벌레들이 지린내를 풍기며
울어주는 공터로 돌아온 그는 벽시계를 업어다
한데와 내통하는 벽장을 막았다 그는 홀몸으로
복어 배를 부여안고 서글퍼한 날들을 회개했다
자신에 대한 소문은 자신만 모른다고
인격 중 가장 어린 아동이 속삭였다
새벽이면 인격들의 중얼거림이 권태와 변태를 불러왔고
언제나 술을 마신 식전이 되었다 세상 어디엔가는
썩은 물만 빠져나오지 못하는 탱크가 있다는 게 사실이었다
눈을 감으면 개펄이 보이는 동네에서 살았다 엎드려 잠자는
할머니뻘 되는 여자가 나타나 자꾸 소란을 피웠다
얼굴을 들고 나다닐 수 없는 동네에서
그는 드디어 모든 술을 끊을 수 있었다
그는 가난을 즐기는 게으름뱅이가 되려다 실패한
수천만 번째 사례가 되었다 작가를 꿈꾸는 시인이었고
출항하는 어부들을 따라 산책 나갔다
그냥 돌아오는 길도 잊은 지 오래되었다
그는 마지막 술병 마개를 비틀었다 지문에
굵은 소금을 찍으며 중국을 떠올렸다
그는 방금 바닷물을 빠져나온
젖은 몸, 파란 입술을 깨물었다
- 이윤학 「공터의 벽시계」 전문
     
     
「공터의 벽시계」에서 그려지는 풍경은, 쉽게 명시될 수는 없으나 불투명하고 부조리한 삶의 처절함과의 싸움이며 존재의 숙명에 대한 의심이다. 다수의 정체성을 지닌 화자는 “권태와 변태"의 나날들을 보낸다. 화자는 “작가를 꿈꾸는 시인"이었으나 “가난을 즐기는 게으름뱅이"도 되지 못하고 “마지막 술병 마개를" 비튼다.
       
기묘한 것은 고통에 빠진 자일수록 자신이 생의 변경에 속해 있다고 자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고통의 중심에 있는 존재가 생의 중심에서 추방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실존의 딜레마는 「공터의 벽시계」를 관통하고 있는 거대한 그늘이다.
  
화자는 “벽시계를 업어다/한데와 내통하는 벽장을 막"는다. 이때 ‘공터의 벽시계’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도구이며, 생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이다. 그러나 생으로 인한 고통의 대가가 생으로부터의 소외일 때, 유혹처럼 다가오는 죽음도 있다. 고통 속에 모호해질 뿐인 생은 화자에게 실체가 없거나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 화자의 생에 난 빈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생의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는 죽음의 힘에 제압되기 직전의 부서지고 허약한 생의 관념에서 씌어졌다. 생과 자아의 치명적인 불균형 속에서 탄생하는 이 도저함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화자는 단순한 삶의 권태가 아니라 삶의 운명적 불구성을 내면화하는 동시에 개체로서의 고립을 감수해내고 있다. 이러한 파편화는 현대 사회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시인은 이중의 몫을 감내하면서 고립된 내면의 균열과 내압을 언어화한다. 이것이 시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화자가 지나쳐온 “서글픈 날들"은 “썩은 물만 빠져나오지 못하는 탱크"에 갇혀 있다. 회개를 해도 소용없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것을 관망해야 하는 고통은 ‘시인’으로서의 파토스로 전환되면서 삶의 진정성과 고통의 밀도를 획득한다. 
       
불안정한 실존 속에서 격렬한 감정이 위태롭게 분출되지만 화자는 고뇌의 대상을 회피하지 않는다. “공터의 벽시계"로 표상되는 생의 상처 속에서, 소멸하는 것과 곧 소멸할 것들이 가득한 삶의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쓸쓸하게 지켜보거나 고통스럽게 견디거나 때로 완강하게 부정하는 것 정도일 뿐이다.
            
“바닷물을 빠져나온/젖은 몸"으로 “파란 입술을 깨"무는 화자는, 결국 생이 죽음에 귀속되는 장면을 통해 생을 성찰하고 그 힘으로 생을 지속한다. 화자에게 생 자체보다 더 허약한 것은, 생과 그 자신의 위태로운 관계이다. 자신이 곧 생의 바깥으로 이탈하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도 화자는 시간의 흐름을 감내해야 하는 불구의 존재가 된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생의 폭력은, 시간의 질서와 삶의 의미를 흩어놓는다. 생의 활력을 박탈당한 존재의 내면은 죽음에 흡수되며, 무력한 삶의 이력을 수렴하게 된다.
      
시인이 그려내는 이러한 죽음의 이미지는 삶의 흠집과 훼손을 수락하기보다는 차라리 전멸을 택하는 것, 조금씩 몰락해가며 완전한 파괴를 원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바닷물을 빠져나온" 것처럼 파멸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얻게 되는, 생의 시간을 시인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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