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다 쏟아지는 수십 종의 계간지와 월간지의 작품들을 허겁지겁 읽다보면 그 작품들을 자연스레 두 가지 부류로 대별할 수 있다.
     
구분의 기준이야 시(詩)에 대한 정의만큼 많겠지만 직관적으로 거칠게 나눠보자면, 하나는 바깥세계를 향해 일직선으로 줄달음치는 표현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높이보다는 깊이를, 그리고 바깥보다는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도시의 삶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작품들 중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는 단순히 하나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한 벌의 이미지들이며 메시지들의 회로이다. 도시는 감각적 느낌과 그것들이 계획하고 강제하는 조건을 설정하고 있는 동시에 자본이 계속해서 증식하도록 강요되는 것처럼, 그 자본의 문화도 끊이지 않는 거대의 문화이기도 하다.
  
도시는 앞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는 것, 진보할 수 있는 것들이 스스로 정체하고 독립자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이를테면 도시에서 개인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며, 영원한 이주민(?)의 신분적 한계로 인한 고통을 받고, 스스로를 미래와 맞바꿀 만한 것도 없는 존재이다.
   
이때 일군의 시인들은 도시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의 삶이 진정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과정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되풀이한다. 오늘 이 자리에는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인의 불안과 예민한 경험이 작동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모아봤다. 
   
    
쩌억 입 벌린 악어들이 튀어나오고 있어 물병의 물들이 피로 변하고 접시들은 춤추고 까악 깍 울고 표범들이 담을 뚫고 달려오고 있어
뭐 이런 일이 한두번이냐,
봄밤은 건들건들
슬리퍼를 끌고 지나가는데
덜그럭 덜그럭
텅 빈 운동장 트랙을 돌고 있는 유골들
통곡도 뉘우침도 없이
작년 그 자리에 피어나는
백치 같은 꽃들
누가
약에 취해 잠든 내 얼굴에 먹자(墨字)를 새기고 있어
도둑놈, 개새끼, 사기꾼
인둣불을 지지고 있어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것이
생글생글 웃는 것이
- 전동균,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전문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것"이 무엇일까? 무슨 수수께끼 같은 이 물음은 시를 다 읽고 나서도 좀처럼 명확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은 새삼 투명하다. 혼란스럽지 않게 동원된 시적 이미지들이 그렇고, 정제된 시인만의 언어가 그렇다.
 
시인의 이런 투명한 시를 들여다보면 시인만의 정신적 엄격성과 예술가적 의식의 명료성이 드러난다. 아마도 이러한 투명성은 그의 시적 재능과 비판적 감성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룬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서 적절한 자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살피는 자기 통제력이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통제력은 여타 시인들과 달리 독자를 거북하게 만들지도 않고, 독자와의 공감력을 높이면서 오히려 친근하게 감싸는 느낌을 선사한다. 다시 말해 전동균이 지닌 시적 투명성은 독자를 끌어들이는 포용의 힘을 미덕으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위의 시는 이러한 미덕을 한껏 보여준다. 개인적 서정성에 함몰하거나 자기 자신만의 감정을 과장하는 이기적 낭만주의자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투명한 시 안에서 독자인 우리의 모습을 비쳐보고, 시인이 내세운 시적 자아와 독자가 자연스럽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데 능하다.
 
시인에게 봄은 쉽게 날 수 있는 계절이 아니다. 매번 봄이 찾아오지만 시인에게 봄은 특히 봄밤은 매번 하나의 공포에 가깝다. ‘악어’와 ‘표범’과 ‘핏물’이 등장하는 공포의 무대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작 화자는 절대적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뭐 이런 일이 한두번이냐"며 오히려 천연덕스럽다. “건들건들" “덜그럭 덜그럭" 지난해와 다름없는 꽃이 피고 지난해와 다름없이 화자가 지난다.
    
그러나 이런 익숙한 공포에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었는지, 봄밤의 잠이 항상 그러한지, 화자는 “약에 취해" 잠이 든다. 그리고 그런 봄밤에 누군가 화자의 “얼굴에 먹자(墨字)를 새기고 있"다.
 
“도둑놈, 개새끼, 사기꾼". 천인공노할 범죄는 아니어도 살다보면 어느 순간 본의 아니게 듣게 되는, 욕설에 가까운 것들이다. 지워지지 않게 “인둣불"로 “먹자"를 새기는 이는 누굴까?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주제에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봄밤은 건너온 유령일까? 봄밤 그 자체일까?
  
시인은 안일한 일상의 삶과 그 삶의 굴레로부터 빠져나와 스스로를 돌아본다. 세계 앞에서 자아를 함몰시키거나 허무주의적 태도를 취하지도 않고, 세계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몸짓도 과장하지 않는다. 내부의 감성에 부딪쳐오는 삶의 한 단면에 예민하게 반응할 뿐이다. 분명 존재하지만,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저편에 대한 화자의 관심과 욕망은 서로에 대한 인정에서 불안전한 화해를 유지한다.
      
화자는 봄밤을 ‘악어’와 표범’으로 부르고, 봄밤은 화자를 ‘도둑놈’ ‘사기꾼’으로 부르는 풍경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까닭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절제되고 세련되었으나, 결코 기교에 의해 치장되지 않는 비유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시인에게는 낭만주의자나 몽상가가 아닌 다른 호칭이 필요할 것 같다.
   
  
아주 먼 곳으로 떠돌 때만 다가오는 고향 같은 저녁이 온다
홀로 노을이 점점 붉어가는 사월의 보라매공원 대운동장 저편
무엇이든 지우거나 삼키려 드는 큰 입을 등 뒤에 숨긴 어둠이,
일생을 두고 감추고 싶은 비밀 같은 밤이 밀려오고 있다
행여 단단한 각오나 용기 없이는 무작정 빨려 들어갈 뿐인 무인칭의 시간,
미처 그만이라고 소리칠 새 없이 미지의 힘에 이끌린 채 잠시 거기 머물러 있을 뿐인,
그러나 짐짓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또 하나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차라리 나라면 결국엔 이문 남기며 파장하는 골목시장의 상인들 같은 소란,
짐짓 자신마저 속고 마는 평화보다 덜컥 거리의 유세를 택할 고요가
연신 연초록 느티나무 나뭇가지로 귀가하는 참새 떼처럼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어디에도 없는 나를 끝없이 호명하는 저물녘의 어머니
더는 버틸 힘없는 영혼의 다리뼈를 일으켜 세우던 삼종三鐘의 종소리 같은,
자칫하면 미처 예상치 못한 억센 손길에 찢겨 죽을 수도 있은 과거 혹은 미래가,
아니면, 결국 너와 나 사이 하나의 깊이로 불러 모으는 해구의 소용돌이가.
- 임동확, 「저녁이 온다」 전문
  
  
거리에 비례하는 공간적 그리움에는 그만큼의 현실적 원심력이 작용한다. 도시의 어둠과 밤은 언제나 고향을 떠나 있는 이들에게 하나의 폭력과 불안으로 다가오고, 화자는 “어느 순간 그 어디에도 없는 나"가 되고 만다.
  
화자는 도시의 삶이 가져다주는 안정과 타성 사이, 평화와 불안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시인은 자기 성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불어 독자까지도 긴장의 세계로 유도한다. 서울, 도시 삶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일탈의 공간을 지향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화자는 고향을 떠나와 외톨이처럼 아니, ‘무인칭’으로 서게 된 소외된 삶의 궤적을 그려본다.
   
도시의 어둠은 고향의 어둠과 다르다. 유년의 따뜻한 기억과 포근한 안식이 준비된 고향에서의 어둠은,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해저물녘 나를 찾는 어머니의 정겨운 목소리나, 하루 세 번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울리는 평화와 안식의 ‘삼종의 종소리’와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도시의 어둠은 “무엇이든 지우거나 삼키려 드는 큰 입을 등 뒤에 숨긴" 위협이며 위장에 불과하다. 도시의 호흡에 어울리게 메마르고 팍팍하고 건조한 시적 배경 속에서 화자는 도시에 대한 환멸과 공포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미처 예상치 못한 억센 손길에 찢겨 죽을 수도 있은" 시간성은 고향의 공간성을 능가한다.
     
우리 사회의 현대성이 공간성보다는 속도의 시간성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두가 속도에 정신이 팔려 앞으로만 나아갈 때 화자는 홀로, “사월의 보라매공원 대운동장 저편"의 붉어가는 노을을 바라본다. 어둠은 신비롭고 은밀하며 새로운 생성을 품고 있는 하나의 조건이다.
    
화자는 현실과 몽환 속에서 스스로에게 숨겨져 있는 순수한 표상들을 읽어낸다. 그것은 도시에 길들여진 문명의 방식으로 위장된 평화보다는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골목시장의 소란’이나 귀가하는 참새 떼들의 바쁜 날갯짓이다.
      
시인은 황폐한 도시에 맞서는 예민하고 불우한 자아가 아니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종소리를 잊지 않는 낭만적 자아다. 스스로 아픈 마음을 달래며 “너와 나 사이 하나의 깊이로 불러 모으는 해구의 소용돌이"를 그릴 줄 아는 자이다.
   
상처받은 영혼에서 상처를 준 세상을 응시하고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낭만적 의지는 소외된 자아의 수동적 삶에 함몰되지 않는다. 아련한 그리움을 간직한 서정적 목소리서의 자아로 “또 하나의 시대" 또 하나의 시간에 도달하기를 염원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이해되기 보다는 느끼고 품고 새기는 것이 옳은 독법 같다.    
 
 
 

키워드 연관기사

ⓒ 서울스트리트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