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삶이 비개인적이며 억압적인 어떤 힘에 의해 형성되고 조종되고 있다는 노여운 사실에 대해 시인들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시인은 사사로운 감정과 특수한 개인의 경험을 과장하면서 스스로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본다.
     
어떤 시들은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현실의 불안이 인간 존재에 내재하고 있으며 구체적 대상이 없는 실존의 것이라 하고, 어떤 시들은 생활 세계의 운행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직접성의 것과 관계돼 있다고 항변한다.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시인들은 삶의 불안이 인간의 왜소화와 자아 상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소외와 상실을 넘어 가치로서의 어떤 갈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보니 젓가락이 휘어 있다, 반찬보다 먼저 미끄러지는 어제의 다짐, 몇 번을 읽은 만화책을 밀어놓고, 늦은 밤 현관문이 겨울 쪽으로 넘어진다, 평균적 생활이라는 믿음, 아파트상가 삼 층 개척교회, 마지막 신자를 잃은 지 오랜 것들, 음지에서 극지를 노려보는 2와 1/2톤 트럭 아래 길냥이, 지금 쏟아지는 건 치기가 아니다, 건들바람이 황량한 겨드랑이를 확인하고 가고, 슬리퍼가 나를 고쳐 신는다, 야간업소 포스터 속 오빠도 이리저리 돌아눕는 무렵에, 온종일 기다림을 짓는 버스정류장, 돌들의 자리를 옮겨대면서, 툭툭 얼어붙은 기억을 떼어내면서, 걸음마다 고이는 소음, 굴뚝 위 난쟁이의 표정을 향해 꽃마리가 흔들리는 시간에, 드디어 막차가 어둠을 토한다, 모두 내게로 쏟아지는 것들, 그리고 처녀 때 부터 입던 외투를 걸친 여자, 괜스레 비도 눈도 아닌 것을 털어본다, 미소를 흉내 내는 저 안간힘의 이유들이여,
- 안숭범, 「하차」 전문
   
   
안숭범 역시 위의 임동확과 동일한 서정적 자장을 공유하고 있다. 시인은 휘어지고, 미끄러지고, 넘어진, 삶의 한복판에 시적 화자를 배치한다. 그리고 현대의 삶이 내포하고 있는 증오나 난폭함으로 갈등하는 마음자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본성의 것들을 하나의 정형화된 틀 안에 가두어 획일화시키려는 도시성에 대한 저항을 오히려 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바람이 불고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막차의 시간에서 화자는 “안간힘의 이유들"을 찾는다. 팍팍한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경직된 현실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게 자꾸 눈이 가게 된다. 오래 전에 휘어져 있었으나 오늘에서야 발견하게 되는 ‘휘어진 젓가락’과 더 이상 신자가 없는 ‘개척 교회’라든지, 트럭 밑에 있는 ‘길고양이’라든지, 오래된 외투를 걸친 여자라든지, 하다못해 바람에 휘날리는 야간업소 포스터에도 눈길이 간다.
    
화자의 눈에는 이것들이 모두 자신의 마음과 다르지 않아서 그렇다. 이것들은 부정적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그저 “미소를 흉내 내"며 버티는 모양새다. 이러한 풍경과 이미지들은  “평균적 생활이라는 믿음"에 수렴된다. 하지만 인위적인 희망의 암시 같은 것은 없다.
   
시인은 엄격한 자의식이나 절제된 표현보다는, 숨어 있던 감성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풍부하고 세밀한 시선의 언어들을 내보인다. 시인은 우리의 시력으로는 좀처럼 보기 힘들거나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을 소환하며, 사물의 이면을 들춰내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가 축조해놓고 있는 시적 공간 속에서 대상과 사물은 이전의 표정을 벗고 민낯으로 다가오고 독자들은 그것들을 통해 보다 깊은 내면의 교환을 경험하고 연결을 체화하게 된다. “어제의 다짐"과 “평균적 생활"을 믿고 싶어 하는 화자에게 세상은 방해자나 혹은 적대자로서의 존재로 등장하기 쉽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들 틈에서 오히려 동반자의 표정들을 발굴해낸다. 세계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불합리를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왜소하고 무력한 화자 자신의 내면과 동질의 것들을 찾아냄으로써 소외와 단절을 극복해내고자 한다. 이러한 모습은 위의 임동확이 보여주는 삶의 성찰자적 모습이라기보다는 달관 내지 탐색자적 모습에 더 가깝다. 갈등과 고민을 내면화하고 해소하고자 하는 “안간힘의 이유"가 실은 여기에 있는 ‘인정’일지도 모른다.
  
  
너는 우주에서 자유로운 여자
공굴리기를 하는 서커스의 단원처럼
임시천막 같은 둥근 지구를 바라보며
커다란 막대사탕의 무늬처럼 돈다
 
그리운 무중력
하이힐도 세탁기도 필요 없는 무중력
떠다니는 물방울로 머리를 감고
풍경 따윈 필요 없는 창문을 가진
너는 우주인
너는 기분 좋은 갈매기
 
나는 지구의 골목에 있고
모든 중력에는 수만 가지의 따가운 간섭이 있는
지구에 남겨진 여자
너는 무중력의 배란기
나도 무중력의 배란기를 가질 수 있었다면
중력의 계단에 앉아 지루한
헛구역질은 하지 않았겠지
 
너의 발은 지구의 기우뚱거리는 관습을 지우고
간섭의 궤도로부터 낭만적이다
 
너는 빛나는 귀환이 있는 부양(浮揚)이 있고
나는 빛나는 도피도 없는 부양(扶養)이 있다
 
나의 예민한 귓바퀴는
사탕의 동그라미를 도는 분홍색 맛을 꿀꺽 삼킨다
 
당신은 중력을 이탈하고 있습니다
  
중력은 나를 놓치고
나는 중심을 버린다
- 조미희, 「그리운 무중력?발렌티나 테레시코바에게」  전문

    
   
위에서 읽은 안숭범의 시가 현실의 굴레 속에서 안간힘을 쓰듯 각각의 삶의 방식을 재탐색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반성적 태도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면 이번 조미희의 작품 역시 일상과 현실의 중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그의 시선은 우주로 확장된 한 지점에서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인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를 소환해내고 있다.
  
화자는 지구라는 작고 둥근 행성의 중력에 묶여 있는 자신과 중력을 벗어나 저 무한대의 우주를 날고 있는 테레시코바를 비교한다. 화자 스스로를 “모든 중력에는 수만 가지의 따가운 간섭이 있"다고 토로하면서 일탈이 아닌 탈출을 꿈꾼다. “지구의 기우뚱거리는 관습을 지우고/간섭의 궤도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러면서 화자를 얽매는 중력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잊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로 ‘하이힐’과 ‘세탁기’, “빛나는 도피도 없는 부양(扶養)"의 비유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화자는 여자로서의 삶, 사회가 요구하는 차별적 역할에 심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시적 정서를 통해 대상과의 아주 먼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심리적 거리를 노출시킨다. 쓸쓸함과 연민은 모든 존재의 숙명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것이 보편적인데, 시인의 경우 오히려 관조를 통해 타자와 자아의 중첩을 느끼게 된다.
  
더욱 눈여겨 살펴야 할 부분은 우주적 상상력과 감각에서 비롯된 쓸쓸함이나 고독의 느낌보다는 오히려 슬픈 운명에 몰입된 감정과 그것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관조하는 모습이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객관화하고, 관조하고자 하는 욕망은 대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 아니라 화자의 위치가 갖는 전형적 미적 거리에서 획득된다.
 
이 작품이 확보한 미적 성취는 이러한 적절한 미적 거리와 심리적 균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않으면서 원거리의 우주인과 근거리의 화자에 대한 조망일 탁월하게 구현되는 지점에서 발현한다.
 
“사탕의 동그라미를 도는 분홍색 맛"과 같은 탈출은 시공간의 확대를 통한 인식적 확장으로, 특히 “당신은 중력을 이탈하고 있습니다"라는 선언적 명제는 일상의 작은 존재와 우주적인 것 사이의 심연을 도약하는 황홀감은 선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열망은 오히려 새로운 삶의 욕구를 가장 잘 응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서울스트리트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