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익명적 차원은 어디에나 있다. 특히 시를 쓰고,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을 창작한다는 것은 결국 세계를 채우는 익명성의 부조리와 무의미 그리고 무기력에 저항하는 일일 것이다. 시인이 어떤 대상의 이미지를 읽어내고 형상화한다는 것은, 이 이미지를 읽는 자신을 읽고, 자기 삶을 키우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시인뿐만이 아니라 시를 읽는 독자도 시를 통해 삶의 독해법을 배운다. 시를 통해 자기 자신의 독해법을 넓고 깊게 만들어 낸다. 고통과 즐거움, 분노와 체념, 이제부터 읽을 여섯 편의 시에 녹아 있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통일될 때, 아니 이러한 통일을 비의도적으로 체현할 수 있을 때, 시의 진정성이 자라 나온다.
시가 시인의 진정성을 통해 삶의 바른 보편성을 획득할 때, 시의 가치는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하나의 원리가 된다. 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하고 무한한 것들, 그것들은 존재의 지평 그 밖에서 오는데, 이러한 무한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시간을 온전히 소유하기 전에는 도달하기 어려운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시도와 모험을 멈추지 않는다. 시인은 지금의 이해가 이전의 이해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확언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미래의 지평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고도 단언하지 못한다. 이해된 것은 언제나 다르게 이해되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삶의 익명성 때문에 그렇다.
인간과 현실, 시인과 시적 대상은 모두 타자의 전경일 뿐이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해도 시인은 그 윤곽을 이해하기 위해 시를 써나간다. 여기에서 개인의 정체성 또는 자아의 주체성은 무한성과 익명성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 자리에서 살펴볼 여섯 편의 시들은 대부분 삶의 불투명성을 의심하고 세계와 미래, 그리고 타자에게 열려 있는 주체의 주체성을 의심하면서 그 시작점을 준비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 탐구에 대한 진정성은 결국 익명성 차원의 보편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며, 시 역시 이러한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시인뿐만이 아니라 시를 읽는 독자도 시를 통해 삶의 독해법을 배운다. 시를 통해 자기 자신의 독해법을 넓고 깊게 만들어 낸다. 고통과 즐거움, 분노와 체념, 이제부터 읽을 여섯 편의 시에 녹아 있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통일될 때, 아니 이러한 통일을 비의도적으로 체현할 수 있을 때, 시의 진정성이 자라 나온다.
시가 시인의 진정성을 통해 삶의 바른 보편성을 획득할 때, 시의 가치는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하나의 원리가 된다. 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하고 무한한 것들, 그것들은 존재의 지평 그 밖에서 오는데, 이러한 무한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시간을 온전히 소유하기 전에는 도달하기 어려운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시도와 모험을 멈추지 않는다. 시인은 지금의 이해가 이전의 이해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확언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미래의 지평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고도 단언하지 못한다. 이해된 것은 언제나 다르게 이해되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삶의 익명성 때문에 그렇다.
인간과 현실, 시인과 시적 대상은 모두 타자의 전경일 뿐이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해도 시인은 그 윤곽을 이해하기 위해 시를 써나간다. 여기에서 개인의 정체성 또는 자아의 주체성은 무한성과 익명성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 자리에서 살펴볼 여섯 편의 시들은 대부분 삶의 불투명성을 의심하고 세계와 미래, 그리고 타자에게 열려 있는 주체의 주체성을 의심하면서 그 시작점을 준비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 탐구에 대한 진정성은 결국 익명성 차원의 보편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며, 시 역시 이러한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화분 꽃은 죽어 있었다
화장장으로 식구 하나를 밀어 넣을 때의 느낌처럼
불의 터널 앞에서 존재들은 무게를 잃는다고
꽃 관을 받쳐 든 내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날부터 악몽은 시작되었다
아이의 윤곽선이 남아 있는 동네 큰길 바닥을
장맛비를 맞으며 폐지를 고르는 노파의 등을
꽃들이 스스로 제 목을 뚝뚝 떨구는 모습을
이 빠진 검은 칼로 손목을 내리치는 상황을
관에 누운 듯 잠들 수 없는 날들이었다
난간 근처 그늘에서 화분이 움직인 건 새벽이었다
마른 흙을 뚫고 잎 하나가 몸을 밀어 올렸다
두려운 일이었다 희망이란 얼마나 뜨거운 악몽인가
화분 앞에 서서 내가 말했다 던져 버려야 한다
무거웠다 온 힘을 다해도 들 수 없었다
쪼그려 앉아 관에서 핀 잎을 보는 내가
눈물인지 땀인지 쩔쩔매고 있었다
- 원동우, 「묵시록 2」전문
원동우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동력은 깨달음에 따른 고요한 슬픔의 경지에서 시작된다. 죽음의 순간에 가닿는 이미지를 통해 시원을 경험한다. 죽음을 경험한 후에 포착한 생명의 황홀함 앞에서 쩔쩔매는 시인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현장에서 생명의 눈부심을 향해 차분하면서도 성찰적인 시선을 만들어간다. 화장장 “불의 터널 앞에서 존재들은 무게를 잃는" 상황 속에서 화자는 이를 살아 있음에 대한 치열한, 본원적 의지로 바꾸어놓는다.
쪼그려 앉아 “마른 흙을 뚫고 잎 하나"를 보고 있던 화자는 “희망을 뜨거운 악몽"이라고 말한다. 살아있으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시인이 다시금 품는 뜨거운 욕망, 그것은 악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인은 죽음과 생명의 동시적 존재로, 생명과 죽음의 혼융에서 깨닫는 고요한 슬픔을 통해 또다른 삶의 동력을 찾아낸다.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생명의 황홀을 확인하고는 시인은 스스로 그것이 “눈물인지 땀인지"도 모를 정도로 혼란에 빠져있다. 눈물과 땀을 이야기할 때 시인은 이미 이것이 생명을 환한 눈부신 몸부림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사이의 내밀한 소통의 통로를 발견한다. 사라진 것과 사라지는 것, 산 자는 죽음을 잉태하고 살아가기에 죽음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비록 그 앞에서 쩔쩔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지라도 말이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듯이 작은 잎 하나에도 순결한 생명이 내재되어 있다. 작은 ‘잎 하나’는 죽음 너머의 찬란한 생으로 귀결되는 정신의 상징으로 견인된다.
시인은 이를 통해 생명과 죽음의 순환은 살아 있는 순간을 넘어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게 되고, 삶과 죽음은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존재를 가로지르게 된다.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삶의 근원일 것이다.
상심에 지친 몸속 한 부분이 가득 차서
무슨 말이든 내게 간절하게 해 주고 싶어
우선 뚜벅뚜벅 아닌 출렁출렁 걷고 있는
나를 불러 세워야 된다고 생각했어
이 자식아, 그건 아닌 듯해
정옥아, 나는 나와 그렇게 살갑지는 못해
남이 부르듯 안정옥, 하고 불렀어
고심하며 내 이름을 지어 준 사람도 있었지
지금은 내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
내가 내 이름을 불러 준 이후부터
뱀 같은 혀들이 다알리아꽃으로 물들일 때
더 애타게 불러 주었어
몇 번 하다 보니 서먹하던 감정도 사라져
내 자신을 나처럼 믿었던 암시,
나와 내가 함께하는 분위기가 되었어
마음을 너에게 맡겼듯 이젠 나에게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했어
내 이름은 오랫동안 나를 먹고 살았잖아
실수해도 내 이름은 푸드득거려선 안 돼
온갖 방법을 쓰며 누구나 온전해지기를 꿈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렇게 장기간 끌려
다니는 건 사람뿐일 거야
이다지 힘든 고독에게 평생 먹여 줘야 하나
남도 아닌 내가 나를 수없이 겨냥한다는 건
곤혹스런 일이긴 해
그러니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이렇게라도
불러 줘야 해
안정옥, 그러나 세상 너무 멀리는 가지 마,
- 안정옥, 「내가 안정옥, 하고 불러 줄 때가 있어」 전문
김춘수 시인은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의 존재 전이를 이야기하지만, 시인 안정옥은 “내가 내 이름을 불러 준 이후"를 이야기한다. 자신을 타자화하고 객관화하여 하나의 대상으로 호명할 때, 이 지점에는 새로운 질서가 생기게 된다. 나와 나 사이의 내밀한 공백말이다. 움직임과 정지,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의 움직임,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 민망한 이 행위는 결국은 자신을 실체화하고자 하는 필연적 과정이며 자세이다.
시인은 타자화된 나와의 내면적 공감을 시도한다. 그 공감을 위해서는, 시인 스스로의 열림 없이는 사물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과 연민의 자기 투신 없이 시인이 어떻게 사물과 세상을 제대로 느끼고 또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항상 절실한 것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화자가 “안정옥, 그러나 세상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가 경험의 대상이 되어 삶의 이질적 균열에서 삶을 보다 완전하게 하고 보충하려는 위로가 된다.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의 타성의 완고함과 이 완고한 습성이 지닌 얼룩진 잔해들 사이에서 화자가 스스로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삶에 대한 사랑과 응원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단순한 경험에 의해 동화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처럼 근원적 타자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인이 타자화한 ‘안정옥’이라는 영원성의 타자는 경험적 개념적 차원을 넘어선다. 시인이 스스로를 타자화한 것처럼 함께 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의 순간도 올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완전한 일체의 환원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삶의 소멸과 생성 사이에서 있는 스스로를 긍정하려고 한다. 그것은 시 속의 ‘안정옥’이 가지고 있는 깊이와 넓이로, 궁극적으로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원동우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동력은 깨달음에 따른 고요한 슬픔의 경지에서 시작된다. 죽음의 순간에 가닿는 이미지를 통해 시원을 경험한다. 죽음을 경험한 후에 포착한 생명의 황홀함 앞에서 쩔쩔매는 시인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현장에서 생명의 눈부심을 향해 차분하면서도 성찰적인 시선을 만들어간다. 화장장 “불의 터널 앞에서 존재들은 무게를 잃는" 상황 속에서 화자는 이를 살아 있음에 대한 치열한, 본원적 의지로 바꾸어놓는다.
쪼그려 앉아 “마른 흙을 뚫고 잎 하나"를 보고 있던 화자는 “희망을 뜨거운 악몽"이라고 말한다. 살아있으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시인이 다시금 품는 뜨거운 욕망, 그것은 악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인은 죽음과 생명의 동시적 존재로, 생명과 죽음의 혼융에서 깨닫는 고요한 슬픔을 통해 또다른 삶의 동력을 찾아낸다.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생명의 황홀을 확인하고는 시인은 스스로 그것이 “눈물인지 땀인지"도 모를 정도로 혼란에 빠져있다. 눈물과 땀을 이야기할 때 시인은 이미 이것이 생명을 환한 눈부신 몸부림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사이의 내밀한 소통의 통로를 발견한다. 사라진 것과 사라지는 것, 산 자는 죽음을 잉태하고 살아가기에 죽음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비록 그 앞에서 쩔쩔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지라도 말이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듯이 작은 잎 하나에도 순결한 생명이 내재되어 있다. 작은 ‘잎 하나’는 죽음 너머의 찬란한 생으로 귀결되는 정신의 상징으로 견인된다.
시인은 이를 통해 생명과 죽음의 순환은 살아 있는 순간을 넘어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게 되고, 삶과 죽음은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존재를 가로지르게 된다.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삶의 근원일 것이다.
상심에 지친 몸속 한 부분이 가득 차서
무슨 말이든 내게 간절하게 해 주고 싶어
우선 뚜벅뚜벅 아닌 출렁출렁 걷고 있는
나를 불러 세워야 된다고 생각했어
이 자식아, 그건 아닌 듯해
정옥아, 나는 나와 그렇게 살갑지는 못해
남이 부르듯 안정옥, 하고 불렀어
고심하며 내 이름을 지어 준 사람도 있었지
지금은 내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
내가 내 이름을 불러 준 이후부터
뱀 같은 혀들이 다알리아꽃으로 물들일 때
더 애타게 불러 주었어
몇 번 하다 보니 서먹하던 감정도 사라져
내 자신을 나처럼 믿었던 암시,
나와 내가 함께하는 분위기가 되었어
마음을 너에게 맡겼듯 이젠 나에게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했어
내 이름은 오랫동안 나를 먹고 살았잖아
실수해도 내 이름은 푸드득거려선 안 돼
온갖 방법을 쓰며 누구나 온전해지기를 꿈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렇게 장기간 끌려
다니는 건 사람뿐일 거야
이다지 힘든 고독에게 평생 먹여 줘야 하나
남도 아닌 내가 나를 수없이 겨냥한다는 건
곤혹스런 일이긴 해
그러니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이렇게라도
불러 줘야 해
안정옥, 그러나 세상 너무 멀리는 가지 마,
- 안정옥, 「내가 안정옥, 하고 불러 줄 때가 있어」 전문
김춘수 시인은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의 존재 전이를 이야기하지만, 시인 안정옥은 “내가 내 이름을 불러 준 이후"를 이야기한다. 자신을 타자화하고 객관화하여 하나의 대상으로 호명할 때, 이 지점에는 새로운 질서가 생기게 된다. 나와 나 사이의 내밀한 공백말이다. 움직임과 정지,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의 움직임,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 민망한 이 행위는 결국은 자신을 실체화하고자 하는 필연적 과정이며 자세이다.
시인은 타자화된 나와의 내면적 공감을 시도한다. 그 공감을 위해서는, 시인 스스로의 열림 없이는 사물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과 연민의 자기 투신 없이 시인이 어떻게 사물과 세상을 제대로 느끼고 또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항상 절실한 것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화자가 “안정옥, 그러나 세상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가 경험의 대상이 되어 삶의 이질적 균열에서 삶을 보다 완전하게 하고 보충하려는 위로가 된다.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의 타성의 완고함과 이 완고한 습성이 지닌 얼룩진 잔해들 사이에서 화자가 스스로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삶에 대한 사랑과 응원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단순한 경험에 의해 동화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처럼 근원적 타자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인이 타자화한 ‘안정옥’이라는 영원성의 타자는 경험적 개념적 차원을 넘어선다. 시인이 스스로를 타자화한 것처럼 함께 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의 순간도 올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완전한 일체의 환원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삶의 소멸과 생성 사이에서 있는 스스로를 긍정하려고 한다. 그것은 시 속의 ‘안정옥’이 가지고 있는 깊이와 넓이로, 궁극적으로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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