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두 번 째 삶입니다. 프랑스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1808-1855)’이 말한 것처럼 우리네 삶의 다채로움과 복잡성을 보여 주고,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사람·물건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터키의 오르한 파묵(Orhan Pamuk·68)이 쓴 <소설과 소설가>라는 책에 담긴 내용이다. 이 책은 그의 하버드대 강연록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는 “이 두 번 째 삶이 우리에게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소설과 현실의 삶에 혼돈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상상의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것은 소설로서의 역할(?)이 미흡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일 듯싶다.

 
궁극(窮極)의 매운 짬뽕, 얼큰
    
“나는 짬뽕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끓인다. 캬! 시원했다. 얼큰했다. 혀가 얼얼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삶은 확실히 짬뽕이다. 아린 맛, 신맛, 쓴맛, 단맛, 짠맛, 매운맛. 다양한 사람과 삶을 모조리 맛보아 주는 거다."
 
예선영(42) 작가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이 낳은 영웅 <진짜 매운 놈이 왔다>의 주인공 ‘얼큰’의 성격이다.
 
‘온다. 느껴진다. 박차고 나오는 급한 에너지다. 길고 시원하다. 뻗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서쪽하늘을 주시한다. 월출산에 그믐달이 올랐다.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났다...세상에 큰 기운을 펼칠 인물이 나타난다는 말이 나오겠다 싶었다.’(277-278쪽)
 
뚱뚱한 주방장은 더 뚱뚱한 코끼리에게 떡을 먹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왕인 박사를 모시고 왔어. 정보와 얼을 전수 받았지. 너희들이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수집하잖아. 그것은 오래전부터 했었지. 동해의 연오랑 세오녀 때도 그랬고. 연오랑 세오녀가 미역을 따러 갔는데 바위가 움직이는 거야. 그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버렸던 거야. 일본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왕으로 모셨어. 이런 전차로 도요토미의 지극히 개인적인 야망 때문에 이 땅이 식민지가 되었잖아. 야! 아무리 우리가 박애정신이 뚜렷해도 그의 야망까지 들어주어야 하냐? 어쨌건, 그때 한국에 있던 정보가 일본으로 건너가 버린 거야. 식민지는 어쨌고. 쌀 빼앗았으면 말 다했지. 무엇이든 안 가져갔겠어? 정보도 빼돌렸고, 정신도 강탈당했지. 역사는 정보싸움이야. 그치?"(291-292쪽)
 
대한민국 월출산에 등장한 큰 바위 얼굴
 
‘큰 바위 얼굴이 낳은 영웅 <진짜 매운 놈이 왔다>’는 판타지이지만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주인공 ‘얼큰’이 돼서.
 
여섯 위인들이 ‘얼큰’의 등 뒤로 왔다. 닥터 왕인이 말했다. 우리는 꺼질게. 그들은 그의 등 안으로 스며들었다. 돌풍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얼큰’은 힘이 넘치는 척추를 곧게 세우고 큰 바위 앞으로 바람을 뚫고 뛰어갔다. 청룡이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거인아! 깨어라."
“오! 얼큰! 친애하는 얼큰! 나는 널 잘 알고 있다. 기다렸다. 태곳적부터 너를 보려고 버티며 기다렸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이 뭐니? 다 들어 줄게."(312-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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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의 큰바위 얼굴. 사진=영암군청 H/P

‘얼큰’은 외쳤다. 엄마 배에서 태어날 때처럼 기를 모았다. 청룡리 고인돌이 공중에 떠서 회오리처럼 돌았다. “지혜로 워라." 큰 바위 얼굴이 외쳤다. ‘얼큰’은 또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뜨거운 가슴, 합리적인 머리, 위풍당당한 배짱, 큰 바위 얼굴이 추임새를 넣었다. 바다건너 제주도의 돌하르방이 눈을 번쩍 떴다.
 
‘얼큰’은 여덟 개의 구슬을 구정봉 우물에 하나씩 넣었다. 사랑·기쁨·공감·평화·친절·진실·양심 ·희망. 마지막 파워스톤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얼큰’은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여의주가 자기를 찾을 것이므로.
 
<‘얼큰’의 몸에서 번개가 치고 강력한 전기가 감아 돌았다. 이집트의 돌무덤과 피라미트 장군총이 흔들렸다. 이스라엘 통곡의 벽이 대각선으로 금이 갔다.(315쪽)

정오 구정봉. 12시가 되자 새로운 세계 진입을 축하하는 오케스트라 축제가 열렸다. 풍각쟁이가 나와서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읽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322-23쪽).
 
필자는 타고르(R. Tagore, 1861-1941)의 시(詩)처럼 코리아가 ‘동방의 등불’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작가에게 물었다. 예선영 작가와의 일문일답이다.
 
?소설 주인공의 이름을 ‘얼큰’ 이라고 작명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얼이 큰, Grand Soul, 큰 바위 얼굴은 위대한 인물·거인·미래의 인간·초인·신인(神人)·위버멘쉬(Ubermensch)영웅·큰 인물을 상징합니다. ‘얼굴이 크다’는 뜻의 ‘얼큰’이라고 요즈음 재미로 많이 쓰기도 하지만, 주인공은 몸은 기본이고 얼이 큰, 정신이 큰 영웅입니다. 기(氣)가 엄청난 큰 바위 얼굴이 낳고 키운 인물, 세계를 매력적으로 이끌 시원하고 ‘매운 정신’을 가진 인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얼큰’이라는 어감은 김치나 고추장처럼 코로나19도 이길 큰 힘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얼큰’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지금까지 세계를 이끌어왔던 서양·물질·황금·자본 중심에서 동양의 황금률과 ‘홍익(弘益) 사랑’ 정신을 더해 균형을 이룬 세상일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찾아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나답게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작가님의 경력 중에 ‘삶 꼬시기 전문 예술가’가 있더군요.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산 자다. 우리는 삶이다. 산 인간은 죽으나 사나 다들 삶을 ‘꼬시며’ 산다. 나는 살면서 삶을 매혹적으로 꼬시기 위해 나를 표현한다. 삶이 나의 매력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 진짜가 되기 위해서. 생명과 존재들과 바람이 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 모든 방법을 그림이나 글이나 춤이나 말 등 모든 표현 방법들을 총동원하는 융합형 예술가입니다. ‘이제는 삶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따라간다. 그랬더니 진짜가 되었다’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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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매사추세츠에 있는 '너대니엘 호손'의 동상.

또 다른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어니스트’

 
“저렇게 생긴 사람을 만나면 틀림없이 나도 아주 좋아하게 될 거야."
“옛날 예언이 정말로 들어맞는다면, 언젠가는 똑같은 분을 만나게 되겠지."
 
너대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54)의 소설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김병철 옮김)에서 어니스트(Ernest)와 그의 어머니가 나눈 대화다.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의 전설을 굳게 믿으면서 자란다. 세월이 흘러 어니스트는 평범한 농부이면서 자애와 진실, 사랑을 설파하는 설교가가 된다. 그가 계곡에서 설교를 하면 마을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동네의 사람들도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온다. 설교를 하는 어니스트의 모습은 자애롭고 신비롭다. 어니스트의 설교를 들은 시인(the Poet)은 그의 모습에서 큰 바위 얼굴을 발견한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여전히 위대한 인물을 기다린다.
 
<어니스트의 이마를 장식하는 백발과도 같은 흰 저녁안개가 그의 얼굴에 길게 끼어 있었다. 깊은 자애로 가득한 표정은 세상 모두를 가슴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자애로 넘친 그 표정을 보고 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보라! 어니스트야말로 큰 바위 얼굴을 빼닮았다!"
 
<사람들은 모두가 눈을 들어 통찰력을 지닌 시인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예언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자 시인의 팔을 잡고 조용히 돌아갔다. 그는 자신보다 현명하고 훌륭한 인간, 큰 바위 얼굴과 빼닮은 인간이 앞으로 틀림없이 나타나기를 여전히 기다렸다.>
 
시인이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치켜세워도 어니스트(Earnegt)는 ‘자신보다 더 현명하고 더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겸손해 한다.
 
우리에게도 정직하고 올곧으며, 근면하면서 자비로운 성격을 지닌 어니스트 같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큰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본다. 이는, 필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염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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