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코로나 블루(Blue)’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우울’의 의미다.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자가 격리’를 넘어 ‘사회적 고립’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8월 전국에서 자살 한 사람이 모두 1849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40명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15.3% 증가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코로나19 감염 확대와 관련 여부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일본의 후생 노동성 관계자는 “자살자 수가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 현재 단정할 수 없지만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코로나19 감염 확대가 자살자의 증가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자세한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필자의 경우 책읽기에 몰입한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이자 작가인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간의 품격』의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59)의 신간 『두 번째 산』(부키/이경식 옮김)이 서점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책장을 열자 제목에 걸맞게 ‘두 개의 산’에 대한 이야기가 실감나게 펼쳐졌다.
  
“기쁨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사람들을 이따금 만난다. 내면의 빛으로 환히 빛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상냥하고 평온하며, 작은 즐거움에 기뻐하고 큰 즐거움에 고마워한다. 물론 이들은 완벽하지 않다.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잘못된 판단을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
 
저자의 말대로 기쁨을 발산하는 사람을 만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스스로를 소중한 존재로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 이러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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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두 번째 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 계곡을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 계곡은 고통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낡은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통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똑똑히 바라볼 때, 그렇게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성공이 아닌 성장을, 물질적 행복이 아닌 정신적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고뇌의 계곡에서 사막의 정화를 거쳐 통찰의 산봉우리에 이르는 것이란다. 사진=부키

‘두 번째 산을 오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인생이란 두 개의 산을 오르는 일과 같다’고 일관되게 강조한다. 어떤 의미일까. 첫 번째 산에서 우리 모두는 특정한 인생 과업을 수행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재능을 연마하고, 자신의 족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노력하는 일 등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들여 평판 관리에 신경 쓰며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자신을 자기의 참모습이라고 여긴다. 또한 좋은 집, 화목한 가정, 멋진 휴가, 맛있는 음식, 좋은 친구들처럼 자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규정하는 통상적인 목표를 추종한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일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은 첫 번째 산의 정상에 올라 성공을 맛보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이게 내가 바라던 전부인가?’ 또 어떤 사람은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호된 실패의 시련을 겪으며 나가떨어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만나 예기치 않게 옆길로 빠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방황한다.
 
“알고 보니 인생은 다른 모습, 한층 더 실망스러운 모습을 감추고 있음을 깨닫는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 사람들은 더는 산 위에 있지 않다. 이들은 모두 당혹스러움과 고통스러움의 계곡에서 헤맨다."
 
저자는 두 번째 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 계곡을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 계곡은 고통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낡은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통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똑똑히 바라볼 때, 그렇게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성공이 아닌 성장을, 물질적 행복이 아닌 정신적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고뇌의 계곡에서 사막의 정화를 거쳐 통찰의 산봉우리에 이르는 것이란다.
 
첫 번째 산과 두 번째 산의 차이
 
첫 번째 산에서는 자아(ego)의 욕구를 채우고 주류 문화를 따랐다면, 두 번째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욕구와 문화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자기 욕구의 수준을 한층 높여 진정으로 바랄 가치가 있는 것들을 바라기 시작한다. 세상은 이들에게 독립(independence)·개인적 자유·세속적 성공을 바랄 것을 요구하지만, 이들은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이타적 헌신·정신적 기쁨으로 시선을 돌린다. 고통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자신의 동기 부여를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타인중심적인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좋은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고통의 시기는 찾아온다. 고통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을 잃고 기약 없는 구직자 신세로 내몰린다. 어떤 사람은 심장마비·암·뇌졸중 등으로 쓰러진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극심한 슬픔을 겪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고통이 극적인 위기가 아니라 무기력·우울증·번아웃(burnout)처럼 서서히 진행되는 위기로 다가온다. 삶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인생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부와 명성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위안과 회복이 되어 주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고통에 맞닥뜨리면 과도하게 움츠린다. 이들은 겁에 질려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슬픔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인생이 갈수록 더 쪼그라들고 더 외로워진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이런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용기를 내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 고통을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로 삼는다."
 
‘사람들의 인생은 가장 큰 역경의 순간에 자기가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규정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간 갈등의 표출인 당파성, 자기의 공허함 채우는 것"
 
저자는 정치에서의 당파성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의 표출이라고 단언한다. 요즈음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과 맞아 떨어진다.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당파성은 어떤 정당이 더 좋은 정책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과 저주받아야 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다. 인종·지역·종교·집단·가족 같은 다른 애착 요소들이 시들어 버리고 없을 때 사람들은 흔히 당파성으로 자기의 공허함을 채운다. 이것은 정치가 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정치에 요구한다. 정치가 인종적·도덕적 정체성이 되고 나면 타협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타협은 불명예가 되기 때문이다. 일단 정치가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되고 나면 모든 선거는 생존 투쟁이 되며, 이 생존 투쟁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부족주의는 애착 관계에서 분리된 개인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정당들은 개인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갈등이 아닌 좋은 정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내리는 최종적인 결론이 무엇일까? 그는 ‘개인주의를 넘어 관계주의로 가야한다’고 강조한다.
 
“첫 번째 산은 개인주의 세계관으로 자아의 욕구를 중심에 둔다. 이와 달리 두 번째 산은 관계주의(relationalism)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인간관계와 헌신 그리고 심장과 영혼의 욕구를 중심에 둔다. 지금까지 내가 주장해왔던 주장의 핵심은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주의 세계관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강조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우리가 속한 사회를 갈가리 찢어 버렸고, 사회에 분열과 부족주의가 팽배하게 만들었으며, 개인적인 지위가 자족의 원리를 숭배하게 되었고, 또 각 개인의 심장과 영혼 속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덮어서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이다.
 
“현대의 삶에서 중심이 되는 여정(旅程)은 자기 자신에서부터 타인을 향한 봉사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동으로 기본값이 설정되어 있는 자아(自我)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해, 심장과 영혼이 말하는 더 높은 차원의 소명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서서히 배워나가야 한다."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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