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계간 '영국 사회심리학저널(British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온라인판 9월 11일자에 실린 논문에서 드러리는 군중이 재난을 당해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일지라도 공포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낯선 사람들을 구해주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사진=뉴시스DB

 

야구장에서 상대편 선수에게 야유를 퍼붓는 응원단이나 밤거리를 누비며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는 거리낌 없이 과격한 언행을 한다. 누구나 군중 속에 섞이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돌멩이를 던지기도 한다. 이른바 군중심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평범한 사람도 일단 군중의 익명성 뒤로 숨게 되면 자제력을 잃고 도덕적 판단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난폭해지고 멋대로 굴게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군중이란 단어가 오합지졸이나 폭도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종·종족·종교 갈등 과정에서 군중이 폭도로 돌변해 살인, 방화, 강간을 일삼은 사례는 역사의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군중의 폭력성은 특수 상황에서 나타나는 예외적인 현상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영국 서섹스대 심리학자 존 드러리는 군중이 재난을 당했을 때의 심리상태에 주목했다. 그는 11건의 군중 재난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면담했다.
 
영국에서 축구 경기장이나 연주회장이 붕괴되어 많은 관중이 죽거나 다친 사건의 생존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체험담을 채집한 것이다. 생존자 대부분은 사고 당시 옆 사람들과 강력한 연대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주변 사람을 밀치지 않고 질서 있는 행동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특히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2008년 계간 '영국 사회심리학저널(British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온라인판 9월 11일자에 실린 논문에서 드러리는 군중이 재난을 당해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일지라도 공포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낯선 사람들을 구해주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군중의 협동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드러리는 실험을 통해 군중이 상황에 따라 얼마나 빠르고 쉽게 심리적으로 일체감을 갖는지를 보여주고, 2009년 '영국 사회심리학저널' 온라인 판 6월 11일자에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군중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강력한 연대감을 구축하는 심리 과정은 사회적 정체성 이론(social identity theory)으로 설명된다. 1979년 영국 사회심리학자 존 터너가 발표한 이 이론은 개인들이 가령 "우리 모두는 붉은악마"라고 말할 때처럼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공유했다고 느끼게 되면 서로를 신뢰하며 힘을 합친다고 주장한다. 군중 안에서 정체성을 확인한 사람들은 판단 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공통 이해를 위해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군중은 단순한 오합지졸에서 벗어나 정신적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드러리의 연구결과에 동의한다면,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집단이 재난을 당했을 때 남을 도우려는 심리상태가 되므로 전체적으로 생존 확률은 높아진다는 것이다. 둘째, 군중은 이성을 잃고 난폭해지므로 강압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경찰이 힘으로 시위대를 밀어붙이는 것은 반드시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없다. 경찰의 과잉진압이 시위 군중을 과격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출처=《마음의 지도》, 조선일보 ‘이인식의 멋진 과학’ 2009년 8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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