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를 펼쳐놓기에도 좁은 작은 호텔과 오후 5시만 되면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좁고 어두운 골목 덕분에 '생애 첫 프랑스'의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25년 전, 나는 디자인과를 졸업한 사회초년생이었고, 방송 일을 하던 친구 덕분에 유럽 몇 개 나라를 항공권 발권만으로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대한 로망은 20대 중반의 여자들에겐(특히 나에겐)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25년 前 처음 '느낀' 파리...불편했던 기억 3종세트
        
기대가 너무 커서 그랬을까?
      
작은 호텔의 여주인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동양인에 대한 비호감과 조식으로 내준 바게트 빵을 요령 없이 먹어 홀랑 까져버린 입천장이, 아침이면 호텔 앞 골목에서 들려오는 처연한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파리에 대한 불편한 기억 3종 세트로 남아있다.
      
당시 라파이예트 백화점에서 ‘중국 대전’이라는 거창한 행사를 했었는데 중국 황실풍의 인테리어로 연출한 매장에 도자기며 가구, 다양한 소품들에 프랑스 사람들은 열광했다. 마침 대나무로 짠 작은 여행가방이 맘에 들어 여행자로선 거금을 주고 샀는데, 몇 년이 지난 뒤 친구들은 그 가방은 파리에서 물 건너온 가방이란 타이틀은 신분세탁일 뿐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본질을 직시하라며 깔깔거렸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루브르'에서 시작한다. 어릴 적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화가가 디자이너로 방향 변경이 되었을 뿐, 나의 삶은 늘 '미술'의 언저리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당연하게도 내가 파리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곳은 루브르박물관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루브르에 도착하고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기억하며 최대한 전투적인 자세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녔다. 시간이 흐르고 눈앞에 서있는 조각품이 아까 봤던 거였는지, 처음 보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 왜지? 아무런 감흥이 없는걸..."
       
루브르는 너무 컸고, 모나리자는 너무 작았고,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은 없었고, 다른 그림들에 대해선 공부해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루브르는 그저 오래된 거대한 궁전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시절의 나... 25년 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사진을 찍었는데 차마 올릴 수 가 없다.
    
당시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었으니 지금처럼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고, 기껏해야 미술시간에 배웠던 외웠던  짧은 지식과 아빠가 사다주신 화가의 도록 전집(대부분 인상주의 화가들)이 전부였으니 25년 전의 나는 디자인 전공자였음에도 ‘그알못(그림을 알지 못하는)’이었고, 그 소중했을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같이 스러져갔던 것이다. 
                     
25년 후의 PARIS...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미술관, 퐁피두센터에서 연도별로 나누어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나에겐 그림이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며, 삶의 위안임과 동시에 모든 여행의 목적이 되었다. 25년 후의 파리는 내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도시가 되어있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은 산타크로체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를 감상하고 나오던 중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한다. 우리가 ‘스탕달신드롬’이라 부르는 증상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영화를 보며 울고 웃고, 책을 읽으면서도 등장인물의 감정을 고스란히 함께 느끼곤 한다. 그림 또한 그림 속에 함축되어있는 시대의 서사와 화가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물론 영화나 음악, 문학작품을 대할 때에 비해 그림 속의 에너지의 공유를 향한 진입장벽이 좀 높긴 하지만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자주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스탕달처럼 무릎에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자빠져버릴 작품을 만나게 된다.
       
“어머! 나... 그림 보고 자빠졌어!"
     
“어머! 나... 그림 보고 자빠졌어!"라는 감탄사가 많아질수록 우리 삶은 풍요로워질 것이며 세상은 호기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언 레슬리는 그의 책 ‘큐리어스’에서 호기심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본능이라고 말했다.
     
가끔 세상이 별것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 며 모든 것에 데면데면 해질 때 ‘내가 과연 살아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 때 그림 한 점 보러 가자. 동네에 작은 갤러리도 좋고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을 날아가도 좋다.
    
상투적이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기니까.
   
P.S. [그림보고 자빠지자]라는 타이틀로 10여 차례 글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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