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프레드릭 와츠의 작품을 보면 묘한 동질감이 느껴져서 큰 위안을 받는다. 위태로운 모습으로 혼자 앉아 눈이 가려진 채 한 줄만 남은 수금을 연주하는 여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일까? 겨우 한 줄만 남은 악기로 어떤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이 순간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것이 이 그림의 제목이다"
‘hope(희망)’ George Frederick Watts, 1886, 111.8x142.2cm, Tate Britain, London, UK
 
새로 이전한 사무실엔 지인들이 보내온 화분이 많았다. 크기도 종류도 다양해서 사무실의 분위기가 확 살아났는데, 문제는 이 화분을 돌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고급스러운 동양란은 화초 잘 키우기로 소문난 몇몇 친척 어른들께 보냈지만, 그 외 다른 화초들은 각자의 생명력만큼 살다가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화분이 비어져가니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은 화초들에 조금 더 신경을 써보기로 했다. 사무실은 아침에 살짝 빛이 들뿐 화초들에게 충분한 빛을 공급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출근하자마자 햇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곳으로 화분을 옮겨놓고 물을 주고, 그 자리에 빛이 사라지면 바람이 통하는 작은 베란다 쪽으로 화분을 옮겨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단순한 일도 할 수 없는 날들이 많았다. 아침에 사무실이 아닌 교육장으로 바로 출근해야 하는 경우, 사무실로 출근했지만 이래저래 급히 처리할 일들이 많은 날들은 화분에 물을 주고 자리를 옮겨주는 일은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유독 나의 손을 타는 화분이 있었다. 가느다란 줄기가 유연한 선을 그으며 우아하게 휘어져 있고, 그 줄기 양 옆으로 나란한 잎맥의 손바닥만 한 잎사귀가 달린 연녹색 화초, 하늘하늘한 줄기의 곡선이 아름다웠던 그 화초는 단 하루만 물을 주지 않으면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나의 관심을 강요했다.
    
그런 모습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황급히 물을 주면 다음날이면 다시 줄기는 꺾였던 허리를 펴 아름다운 곡선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런 신경전이 한 달 정도 지속되었을까? 그 사이 남아 있던 화초들은 모두 말라버렸고 나의 관심을 끊임없이 종용하던 그 화초도 얼마 더 못가 말라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화초를 얼마간 키우며 나는 느낀 것이 있다. "나 아파! 나 좀 돌봐줘"라고 외치는 그 연녹색 화초에게 내가 쏟았던 정성은 다른 화초들에 비해 훨씬 컸다. 다른 화초들도 마찬가지로 손길이 필요했을 텐데 그들은 내심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그만 죽어버렸다. 그러나 그 연녹색 화초는 끊임없이 힘들고 아프고 죽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반응하며 그를 살피지 않았는가?
    
나는 늘 그랬다. 힘들어도, 아파도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살았다. 내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기 위해 많은 순간들을 버티고 고통을 감내하며 지내왔다. 선뜻 힘들다고, 싫다고,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강하고 씩씩하게 살아왔다. 내 입으로 힘들다고, 그건 잘못한 거라고, 나는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새  타인들에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아프지 않은 사람, 늘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연초록 화초 같은 사람들은 늘 위로받고 보호받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조지 프레드릭 와츠의 작품을 보면 묘한 동질감이 느껴져서 큰 위안을 받는다. 위태로운 모습으로 혼자 앉아 눈이 가려진 채 한 줄만 남은 수금을 연주하는 여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일까? 겨우 한 줄만 남은 악기로 어떤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이 순간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것이 이 그림의 제목이다. 
         
“저어두운바닥깊이 / 가라앉을때마다 / 끊임없이나를 / 밀어올리는 / 내영혼의 / 부력"
      
송정란 시인의 ‘희망’(띄어쓰기가 없는 詩다)이란 시처럼 절망의 바닥에 닿았을 때 그 자리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 우리를 다시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 ‘희망’이다.
        
와츠의 그림은 화면에서 느낄 수 있는 암담함과 처연함 속에서도 우리를 떠오르게 하는 강한 힘을 가졌다. 이 그림의 제목이 아이러니하게도 ‘Hope’, 희망인 것처럼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작고 연약한 화초 하나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나도 힘들고 아플 때 그 화초처럼 나를 표현해야 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나는 태생이 나를 보아달라고 외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타인이 나를 위로해주고 인정해준다고 해도 그것으로 위로받고 인정받을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내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위로받는 사람이다. 나는 마치 물고기의 부레와 같이 바닥에 가라앉을 때마다 스스로 떠오를 수 있는 희망이란 부레를 가진 사람인 것이다.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 가면 이 그림은 꼭 관람해보시길... 그리고 자신만의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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