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두 개의 포인트가 있는데, 하나는 <모나리자>를 정면에서 보는 것. 두 번째는 모나리자의 시선과 같은 방향을 보며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 이 세상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실망하는 얼굴들을 다이내믹하게 볼 수 있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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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를 감상하는 관람객들. 네이버 블로그 bhappy님의 사진을 빌려왔다. |
루브르 소장 작품들을 흥미롭게 관람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쓰려고 계획하면서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였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 작품? 아니면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이 많을 것이고,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맨 처음 이야기할 그림은 <모나리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나리자>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지난 번 글이 <승리의 여신; 사모트라케의 니케>였던 이유도 <모나리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2005년 4월 이전에 루브르를 방문했었다면 '모나리자'를 만나는 일이 꽤나 짜증나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제대로 그림을 감상하기 어려웠을 테니. 그래서 루브르는 모나리자를 만나러 오는 연간 600만 명의 관람객들에게 조금 더 쾌적한 관람 환경을 제공하고자 2005년 4월 '모나리자 전시실'을 새로 만들었다.
드농관 1층(우리나라로 치면 2층이다)의 711 전시실, 이 공간을 마련하는 데 우리 돈으로 약 60억 원이 들었고 일본의 방송국 NHK가 비용 전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복원의 비용도 NHK가 제공했다. 루브르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오디오 가이드 또한 일본 닌텐도 콘솔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의 오디오 가이드가 현대자동차에서 제공한 것이어서 관람 내내 왠지 ‘국뽕’ 필을 만끽했었는데, 일본인들이 루브르에서 느끼는 감정은 어떨까 생각하면 부럽기도 하다.
모나리자는 100년 전쯤 도난을 당했다가 2년 후 루브르로 돌아오기도 했고, 그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해서 루브르를 지금의 루브르로 만든 1등 공신이기도 하다. 베이지색 대리석 벽에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상자 안에 살고 있는 모나리자. 유리상자 안은 항상 섭씨 6도에 습도 50%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고 자연채광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유리천장과 자연적인 색감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특수조명이 있는 호화로운 방의 주인인 모나리자는 아쉽게도 절대로 루브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뭐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판다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루브르로 오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귀하신 <모나리자> 전시실엔 모나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52개의 다른 명화도 걸려 있다.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16세기 이탈리아 그림들이다. 711 전시실에 있는 그림들은 왠지 의문의 1패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특히 <모나리자>의 정면에는 루브르에서 가장 큰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미술사의 걸출한 명작이 걸려 있는데도 모든 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주 작은 모나리자이니 말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 작품? 아니면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이 많을 것이고,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맨 처음 이야기할 그림은 <모나리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나리자>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지난 번 글이 <승리의 여신; 사모트라케의 니케>였던 이유도 <모나리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2005년 4월 이전에 루브르를 방문했었다면 '모나리자'를 만나는 일이 꽤나 짜증나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제대로 그림을 감상하기 어려웠을 테니. 그래서 루브르는 모나리자를 만나러 오는 연간 600만 명의 관람객들에게 조금 더 쾌적한 관람 환경을 제공하고자 2005년 4월 '모나리자 전시실'을 새로 만들었다.
드농관 1층(우리나라로 치면 2층이다)의 711 전시실, 이 공간을 마련하는 데 우리 돈으로 약 60억 원이 들었고 일본의 방송국 NHK가 비용 전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복원의 비용도 NHK가 제공했다. 루브르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오디오 가이드 또한 일본 닌텐도 콘솔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의 오디오 가이드가 현대자동차에서 제공한 것이어서 관람 내내 왠지 ‘국뽕’ 필을 만끽했었는데, 일본인들이 루브르에서 느끼는 감정은 어떨까 생각하면 부럽기도 하다.
모나리자는 100년 전쯤 도난을 당했다가 2년 후 루브르로 돌아오기도 했고, 그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해서 루브르를 지금의 루브르로 만든 1등 공신이기도 하다. 베이지색 대리석 벽에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상자 안에 살고 있는 모나리자. 유리상자 안은 항상 섭씨 6도에 습도 50%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고 자연채광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유리천장과 자연적인 색감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특수조명이 있는 호화로운 방의 주인인 모나리자는 아쉽게도 절대로 루브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뭐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판다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루브르로 오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귀하신 <모나리자> 전시실엔 모나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52개의 다른 명화도 걸려 있다.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16세기 이탈리아 그림들이다. 711 전시실에 있는 그림들은 왠지 의문의 1패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특히 <모나리자>의 정면에는 루브르에서 가장 큰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미술사의 걸출한 명작이 걸려 있는데도 모든 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주 작은 모나리자이니 말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두 개의 포인트가 있는데, 하나는 <모나리자>를 정면에서 보는 것. 두 번째는 모나리자의 시선과 같은 방향을 보며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 이 세상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실망하는 얼굴들을 다이내믹하게 볼 수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모나리자 전시실에 가면 꼭 빼놓지 말고 보기를 바라는 몇 개의 그림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그중 첫 번째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프랑스의 루브르의 대표작으로 존재하게 만든 사람의 초상화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모나리자에게만 정신이 팔려 모든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한 남자. 그 모습이 한편으로 애틋하고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내 마음 같아서는 반대쪽 벽에 붙여놓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아무튼 모나리자 전시실에 가면 꼭 빼놓지 말고 보기를 바라는 몇 개의 그림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그중 첫 번째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프랑스의 루브르의 대표작으로 존재하게 만든 사람의 초상화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모나리자에게만 정신이 팔려 모든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한 남자. 그 모습이 한편으로 애틋하고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내 마음 같아서는 반대쪽 벽에 붙여놓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그 그림은 바로 티치아노가 그린 프랑수아 1세의 초상이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수아 1세는 1494년에 태어나 루이 12세의 무남독녀 클로드와 결혼한 뒤 장인이 사망하자 1515년 왕좌에 오른다. 낙천적이고 호방한 성격의 프랑수아 1세는 왕이 된 그 해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밀라노를 손에 넣는다. 그러나 뒤이어 여러 전쟁에서 패하거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그는 이탈리아의 뛰어난 문화예술에 크게 감명을 받아 이탈리아의 그림과 조각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의 치세 기간 동안 왕실 소유의 건물들이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개조되거나 신축되었다.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으며, 오늘날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화자본의 토대를 만든 왕 프랑수아 1세. 초상화에서 알 수 있듯 뾰족하고 긴 코 때문에 ‘큰 코 왕 프랑수아’(Francois au Grand Nez)란 별명을 가졌던 그는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데려오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정치적인 이유로 1515년 볼로냐에서 교황과 회동을 하며 다빈치를 만나게 되고 그의 능력에 반해 그를 프랑스로 초청한다.
결국 1516년 다빈치는 그의 부름에 응해 프랑수아 1세가 마련해준 프랑스 앙부아즈 성 근처 클루의 저택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물론 파격적인 연금이 보장된 상태였다.
지금도 다빈치가 살았던 저택의 지하에는 앙부아즈 성까지 이어지는 지하통로가 남아있는데, 왕은 수시로 이 지하통로를 통해 다빈치를 만나러 왔다고 한다. 42살의 나이차가 나는 두 사람은 친구처럼 부자지간처럼 서로의 우정을 나누었다. 프랑스 궁정 최고 화가로 임명되어 프랑수아 1세의 극진한 대접을 받던 다빈치는 안타깝게도 프랑스에 온 지 3년이 지난 1519년 5월에 생을 마감한다.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지내는 3년 동안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 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프랑수아 1세가 그를 mon pere몽페레(내 아버지)라고 불렀을 만큼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던 사이였다고 한다. 다빈치가 죽을 때까지 곁에 두고 아꼈던 작품 <모나리자> 그리고 프랑스로 오며 지니고 있던 <밀라노 귀족부인의 초상> <세례자 요한> <동굴의 성모>등이 다빈치 사후 프랑스 왕실에서 재빠르게 사들인 작품들이다.
어쩜 프랑수아 1세는 <모나리자>를 바라보며 마치 아버지의 유품과 같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을까? 시간이 흘러 지금 그 <모나리자>가 걸려있는 전시실 한쪽에서 위풍당당하게 모나리자를 지키고 있는 프랑수아 1세의 초상을 보면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든다. 다빈치가 프랑스에 머문 것은 고작 3년이지만 그가 일생동안 그린 그림의 수를 생각해보면 이탈리아의 화가 다빈치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다. 프랑수아 1세의 예술적 안목이 문화 예술 강국 프랑스를 만드는 시초가 됐다고 하면 프랑스의 행운 아닐까. 현재 우리가 감동해마지않는 루브르의 이탈리아 회화 컬렉션은 전적으로 프랑수아 1세의 공적(功績)이다.
아쉬움이라면 이 초상화가 반대쪽 벽에 걸려있었다면 프랑수아 1세의 시선이 모나리자를 향해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 스토리가 조금 더 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한 가지 더! 이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가 말년에 그린 것인데, 실제로 프랑수아 1세를 본 적이 없었던 그는 동전에 새겨진 왕의 부조를 보고 이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으며, 오늘날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화자본의 토대를 만든 왕 프랑수아 1세. 초상화에서 알 수 있듯 뾰족하고 긴 코 때문에 ‘큰 코 왕 프랑수아’(Francois au Grand Nez)란 별명을 가졌던 그는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데려오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정치적인 이유로 1515년 볼로냐에서 교황과 회동을 하며 다빈치를 만나게 되고 그의 능력에 반해 그를 프랑스로 초청한다.
결국 1516년 다빈치는 그의 부름에 응해 프랑수아 1세가 마련해준 프랑스 앙부아즈 성 근처 클루의 저택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물론 파격적인 연금이 보장된 상태였다.
지금도 다빈치가 살았던 저택의 지하에는 앙부아즈 성까지 이어지는 지하통로가 남아있는데, 왕은 수시로 이 지하통로를 통해 다빈치를 만나러 왔다고 한다. 42살의 나이차가 나는 두 사람은 친구처럼 부자지간처럼 서로의 우정을 나누었다. 프랑스 궁정 최고 화가로 임명되어 프랑수아 1세의 극진한 대접을 받던 다빈치는 안타깝게도 프랑스에 온 지 3년이 지난 1519년 5월에 생을 마감한다.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지내는 3년 동안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 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프랑수아 1세가 그를 mon pere몽페레(내 아버지)라고 불렀을 만큼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던 사이였다고 한다. 다빈치가 죽을 때까지 곁에 두고 아꼈던 작품 <모나리자> 그리고 프랑스로 오며 지니고 있던 <밀라노 귀족부인의 초상> <세례자 요한> <동굴의 성모>등이 다빈치 사후 프랑스 왕실에서 재빠르게 사들인 작품들이다.
어쩜 프랑수아 1세는 <모나리자>를 바라보며 마치 아버지의 유품과 같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을까? 시간이 흘러 지금 그 <모나리자>가 걸려있는 전시실 한쪽에서 위풍당당하게 모나리자를 지키고 있는 프랑수아 1세의 초상을 보면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든다. 다빈치가 프랑스에 머문 것은 고작 3년이지만 그가 일생동안 그린 그림의 수를 생각해보면 이탈리아의 화가 다빈치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다. 프랑수아 1세의 예술적 안목이 문화 예술 강국 프랑스를 만드는 시초가 됐다고 하면 프랑스의 행운 아닐까. 현재 우리가 감동해마지않는 루브르의 이탈리아 회화 컬렉션은 전적으로 프랑수아 1세의 공적(功績)이다.
아쉬움이라면 이 초상화가 반대쪽 벽에 걸려있었다면 프랑수아 1세의 시선이 모나리자를 향해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 스토리가 조금 더 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한 가지 더! 이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가 말년에 그린 것인데, 실제로 프랑수아 1세를 본 적이 없었던 그는 동전에 새겨진 왕의 부조를 보고 이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조르조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에서 다빈치의 머리를 안고 임종을 지킨 왕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후대의 화가들에 의해 감동적인 또 다른 장면의 그림들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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