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파동 이후 우리 생활주변의 화학제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위험성분이 혹시라도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경각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최근 유해성 논쟁이 불거진 것 중에 ’감열지(感熱紙)’가 있다.
감열지는 마트의 영수증, 대기표 등에 주로 쓰이는 용지를 말한다. 이 용지는 롤 형태의 종이에 염료와 현상제를 미세하게 같이 부착한 형태다. 평상시에는 투명하지만 인쇄할 부분에 열을 가하는 헤드를 거치면 염료와 현상제가 서로 합쳐져 화학반응을 하고, 열을 가한 부분만 검은색 등으로 변색된다.
이런 감열지 기술 덕분에 우리는 예전에 찍찍 소리를 내며 영수증을 인쇄했던 도트 인쇄기 등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비싸고, 복잡한 도트, 레이저, 잉크젯 등의 프린터를 대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민단체들이 최근 주요 대형마트와 백화점 6곳에서 수거한 감열지 영수증을 조사한 결과, 4곳에서 내분비교란의심물질(환경호르몬)인 비스페놀A(BPA)와 비스페놀S(BPS)가 검출됐다는 주장을 내놨다.
BPA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처럼 작용하면서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비만을 일으키며, BPS도 비슷한 환경호르몬 작용을 하는 만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들 시민단체는 주장한다.
▲김길원 기자 |
비스페놀S는 비스페놀A(BPA)에 대한 위해성 논란이 커지자 대체재로 등장한 물질이다. 때문에 BPS로 만들어진 제품들은 ’BPA 없음’(BPA-free)이란 표시가 붙었다.
이들 물질은 영수증을 만질 때 피부를 통해 흡수될 수 있으며 지갑에 영수증과 지폐를 함께 둘 경우 지폐마저도 오염된다고 시민단체는 경고했다.
사실 감열지 논란의 핵심인 비스페놀 계열 환경호르몬의 안전성 이슈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와 검증이 이뤄진 덕분에 이 물질 자체의 유해성은 상당 부분 확인됐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EU 식품안전청(EFSA) 등에서는 안전한 사용 규정을 내놓은 바 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감열지에 들어있는 비스페놀 성분을 다른 안전한 성분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데에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미 상당수 업체는 BPA의 안전성 이슈가 계속되자, 새로운 대체재인 BPS 영수증으로 바꿨다고 한다. 하지만 BPS도 BPA 못지않은 유해성 논란이 일자 이제는 또 다른 대체물질로 옮겨가는 형국이다. 안전성 이슈에 발 빠른 일부 대형 유통업체들은 이미 대체물질을 쓰고 있다며 안전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BPA나 BPS를 대체하는 물질은 무엇이며, 비스페놀 성분만 아니라면 과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감열지에는 기본적으로 현상제와 염료라는 화학물질이 발라져 있기 때문에 사람이 손으로 만지는 이상 이들 물질이 인체에 흡수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따라서 비스페놀을 대체하는 물질도 안전하다는 게 우선 확인돼야 한다. 비스페놀처럼 유해성 여부에 대한 검증이 이뤄져야 하지만 일부 업체들은 이 대체물질이 무엇인지조차 밝히지 않은 채 안전하다고만 주장한다.
이는 소비자들을 마치 가습기 살균제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물질에 노출되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검증된 비스페놀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게 더 나은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의약품으로 비유해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쉽다. 부작용이 이미 확인된 의약품은 주의하면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은 의약품은 사람에게 절대로 쓰일 수 없는 것과 같다.
감열지에 쓰이는 비스페놀 대체물질이 당장 심리적으로 위안이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국민 건강을 생각한다면 어떤 물질이 대체재로 쓰이고, 그 물질이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는 게 우선이다. ■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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