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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이면서 성악가이기도 한 이정식 씨가 노래하고 있다(왼쪽). 네팔 푼힐 전망대에서의 이정식씨. 멀리 8172m의 '다울라기리 1봉'이 보인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우리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특히 잘 부르는 언론인 이정식(67) 씨가 있다. 그는 ROTC(#14) 출신으로 평기자(平記者)부터 CBS 사장,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 등 41년 간 언론계에 몸담았다. 자타가 인정하는 진정한 언론인이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른 전공분야가 있다. 성악가(바리톤)이기도 하다. 음반을 4집이나 냈고, 세종문화회관·예술의 전당 등에서 독창회를 수없이 열었다. 그렇다고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서울대학교 사범대 지구과학과를 졸업했다.
 
지난 18일 기온이 급강하하더니 눈이 펑펑 쏟아졌다. 이정식 씨 장남의 결혼식이 있었기에 집을 나섰다. 이미 대지가 은(銀)빛 세계로 변해 있었다.
 
결혼식장 입구에서 엄격하게 발열(發熱)과 QR코드를 체크했다. 예식장에는 이정식 씨의 살아온 생(生)을 증명하는 듯 유명 인사들의 축하 화환이 꽉 차 있었다.
 
“축하합니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정식 씨의 체중이 눈에 띄게 줄어 있어서 놀랐다. 필자의 표정을 알아챈 그가 먼저 말했다.
“그동안 항암 치료를 했습니다."
“???"

하객(賀客)들에게 선물한 두 권의 책
 
결혼식 축하객들에게 나눠주는 선물이 있었다. 두 권의 책이었다. <여행 작가 노트>와 <제비꽃 정원>이라는 시집이었다.
 
<여행 작가 노트>는 이정식 씨가 썼고, <제비꽃 정원>은 그의 부인이자 신랑의 어머니인 고옥주(63) 씨가 썼다. 결혼식에서는 와인이나 케이크를 답례품으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책을 선물하는 것이 색달랐다. 그것도 본인들이 직접 쓴 책을.
 
신간 <여행 작가 노트>는 ‘내린 눈 내린 숲 앞의 동물-알타이산맥 최후의 오지 포타닌 빙하를 향하여-어머니의 바다 몽골 흡스골 가는 길의 험난했던 여정-홀로 떠난 히말라야 트레킹-민족의 애환이 서린 사할린 섬-천산산맥 신장 중천산 초원 기행-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바이칼 호수-시베리아 여행 Q&A-생명의 위험을 느꼈던 필리핀 동굴 탐사-신비의 땅 라타크, 인간과 노는 야생동물’ 등 10부로 구성돼 있었다. 직접 찍은 사진도 곁들여져 있었다. 책을 펼치자 다음과 같은 머리말이 나왔다.
 
“모든 이들은 여행 작가다. 글·사진·영상의 기록으로 남긴다면...기록은 나를 위한 것이고, 동시에 남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자취이고, 크게 보면 인류의 자취다. 설레임과 즐거움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하다. 그러나 보고 느낀 것을 잘 정리해 놓을 수 있다면 좀 더 보람될 것이다."
 
그렇다. 여행에는 항상 설레임이 있다. 나아가 설레임은 행복 추구로 이어진다.
세계적인 유명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저서 <여행의 기술>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 준다"고 했다.
 
부인 고옥주 시인의 시집 <제비꽃 정원>으로 들어가 봤다. 때마침 눈이 내리는 날이라서 ‘누구를 위하여 눈은 내리나’를 읽었다.
 
<누운 몸에 생각이 일어서는 불면/ 밤이 삼키고 남은 소리마저 쏙쏙 거두며/ 고요가 짙어지는 기척/ 창밖에 아까부터 하늘가를 쓸어내리는 눈발/.../눈송이가 비눗방울 이듯/ 툭 치면 종소리라도 나듯/ 작은 나비와 희롱하듯 다시 훌쩍/ 아름다움에 대한 예우이듯/ 눈 오는 세상을 한번 어루만지고/ 눈 위 제 발자국에 놀라 스스로 사라진다.>
 
아직은 멀리 있지만, 시집의 제목과 같은 ‘제비꽃 정원’이라는 시도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읽었다.
 
<겨울에서 있는 힘을 다해 목을 빼낸 청보라 한 점/ 그 청보라 구멍으로 봄은 쏟아져 나온다/.../ 세상의 모든 제비꽃 정원을 위하여/ 밤새 씨들이 잠과 꿈을 쿵쿵 건너 원정을 떠나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이 날의 하객들은 이 두 권의 책으로 추위를 녹였을 것이다.
 
이정식의 여행은 어디까지일까?
 
이정식 씨의 해외여행은 2020년 2월의 몽골 여행으로 중단됐다. 코로나19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불의(不意)의 여행이 찾아왔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해야 하는  ‘암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됐던 것이다.
 
“언론사 CEO로 2019년 8월까지 일했고, 2020년 2월까지 부회장으로 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현역 생활 41년 만에 은퇴하자마자 병원 신세를 지는 처지가 됐습니다. 한창 일할 때 암이 찾아오지 않은 것만도 천만 다행이었어요."
 
직업의식이 충만 된 것일까. 그의 말에 필자가 오히려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책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대라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면서, ‘2019년 혼자서 갔던 히말라야를 꼽겠다’고 했다.
 
그는 암 치료를 받는 중에도 늘 여행을 꿈꿨다. 그러면서 여행에 관한 책을 냈다. <러시아 문학 기행 1, 2>. 사형수에서 대문호가 된 도스토옙스키의 파란 만장한 인생스토리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로 암 판정을 받으면 ‘사형선고’로 생각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데, 이정식 씨는 불굴의 의지로 독특한 여행을 한 것이다.

그의 저서 <여행 작가 노트>는 다음과 같이 마감됐다.
 
“그동안 나의 건강을 걱정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무대 위에서 노래도 다시 하게 되고, 이후 여러 가지 여건이 잘 갖추어져서 앞으로의 여행 계획이 순조롭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는 그의 순조로운 여행을 기대하면서 책을 덮었다. 함박눈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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