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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를 추모하가 위해 묘지 앞에 모인 사람들

아직은 쌀쌀한 4월 2일 이른 아침. 필자는 망우리 공원을 향해 집을 나섰다.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의 탄생 130주년·서거 90주년 한·일 합동추모식 참가를 위해서다. 출근길이라서 더딘 흐름으로 공원입구에 도착했다. 많은 차량들이 좁은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아니?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추모식에 참석한다는 것인가?’

사실은 달랐다. 봄나들이를 온 사람들이 많아서였다. 주차장 구석에 가까스로 차를 세우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개나리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벚꽃·진달래 까지 합세해서 봄기운을 한껏 돋우고 있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의 까치도 ‘깍깍’ 반가워했다. 아사카와 다쿠미 묘지까지는 공원 입구에서부터 20여분이 걸렸다.

한국인과 일본인 50여명 참석...취재 열기도 뜨거워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인 50여명이 모여 있었다. TV조선과 연합뉴스TV 등 한국의 언론과, 마이니치 신문사의 호리야마 아키코(屈山明子) 지국장, 교도통신의 다지리 료타(田尻良太) 기자 등 일본의 언론인들이 고인의 넋을 기리면서 취재에 열중했다. 최병암 산림청장과 (사)한국산림보호협회 중앙회 허태조 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도 화환으로 다쿠미 서거 90주기를 추모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서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까만 돌에 하얀 글씨로 새겨진 묘비명이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는 10시 30분에 시작됐다. 행사 진행은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형제 현창회 사무국장 노치환(58) 씨가 했다. 그의 개회에 이어 헌주는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과 주죠 가즈오(中條一夫) 일본대사관 문화공사가 했다.

이어서 김병윤 아사카와 형제 현창회 부회장이 추모사를 했고, 서울 일본인교회 요시다 고조(吉田耕三)목사가 평화의 기도를 했다. 요시다(吉田) 목사의 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일본)가 대한민국을 침략하고, 온갖 박해와 도탄의 고통에 빠트린 것을 고백하고 참회합니다...아사카와 다쿠미 씨는 이와 같은 어두운 시대에 산림녹화와 도자기, 민예품을 통해 우호 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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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리나 합주를 하는 서울 일본인 교회의 신자들

<누구도 본적이 없는 새로운 일이 지금 이 땅  위에서 일어나네. 누구도 들은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이 지금 일어나네.>


<주님이 홀로가신 그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은은한 연주가 묘지 주변을 감싸면서 흘렀다. 지나가던 등산객들도 발길을 멈추고 동참했다.
 
‘한일 우호증진은 정부가 아닌 민간인의 손에 달려’

주죠 가즈오(中條一夫) 일본대사관 문화공사의 추모사도 특별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최악(最惡)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부 간의 관계에 있어서 의견차이가 있으나, 민간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즐기고, 한국인들이 일본 음식을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고, 맛있는 것은 맛이 있는데...그것을 누가 막는다는 말입니까. 상대방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서로 발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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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석예빈 씨의 헌무

한·일 화해를 기원하는 헌무 ‘현해탄의 봄노래’를 무용가 ‘석예빈’씨가 환상적으로 펼쳤고, 대금명인 이상현 씨가 진혼곡을 연주했다. 모두가 심금을 울리는 춤과 연주였다.


김미희 시인의 헌시 낭독도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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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시를 낭독하는 김미희 시인

<아리수 감돌아 흐르고

 검단산 동녘하늘 어슴 프레
 미명에 아침이 밝으면 서울의 아침도 깨어난다.
 (...)
 소반을 사랑했고
 도자기에 매료됐으며
 흠뻑 한국미에 젖어
 온몸으로 한국을 사랑한 당신
 (...)
 다쿠미여! 무덤에 핀 꽃 우리에게 주고 편히 잠들라.
 언젠가 여길 찾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오엽송 발아법을 개발하고, 산림녹화에 힘썼다.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공림의 37%가 그의 업적이다. 평소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했다. 어려운 조선의 학생들에게 박봉을 털어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1931년 4월 2일 식목일을 앞두고 종묘에 대한 강연을 하러다니다가 과로로 쓰러져서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아까운 나이에 눈을 감은 아사카와 다쿠미. 90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그의 묘지를 사람들이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한국사랑을 펼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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