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에서 풍경(風景)은 일차적으로 외부 세계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경험의 일종이다. 이때 풍경은 인간의 감각체계를 통과해서 생성되는 어떤 이미지와 정서를 의미한다. 시에서 이러한 풍경이 중요한 까닭은 인간의 감각적 체험에 따라 풍경은, 확장되는 전체성의 장이 되기도 하며, 고정되거나 확립되지 않는 비일상적 성격을 지니게 되고, 매 순간마다 갱신되는 또 다른 차원의 표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번 시평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풍경 체험이 단순히 하나의 공간적 경험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의 물리적 배열이며, 미학적 구성임을 살펴보려 한다.
오늘 비는 아무에게나 슬픔을 나눠 준다 우기에는 네 슬픔이 옳았다 오래오래 젖다가 수채화 같은 슬픔이 온다는 말, 몹쓸 흉터에서 잎사귀 같은 불행이 생겨난다는 말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사과나무 가지 끝 풋사과 옆이 무너졌다 나도 저렇게 슬픈 데를 씻다가 무너졌다 슬픔이 없다면 슬픈 게 여럿이던 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없다면 줄곧 믿어왔던 이 많은 책들과 수없이 눌렀던 어두운 버튼들, 맘에 내내 서있던 사람 서랍 속의 흉터들 모두 혼자일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저렇게 흠뻑 슬플 것이다 죽을 것처럼 들고 온 것들, 저렇게 말할 수 없어서 짧게 말할 수 없어서 슬픔은 머리카락이 길고 형용사처럼 영롱하다 우기에는 슬픈 게 슬픈 걸 찾아낸다 슬픔을 그만둘 수 없는 자들이 맹렬하게 기쁨을 잃는다 점 하나 없는 슬픔 언제 그칠까? 주인 곁을 개처럼 지키고 있다
-최문자, 「우기」 전문
삶과 죽음의 이편과 저편, 있는 것과 없는 것, 현실과 내면의 사이, 기쁨과 슬픔의 틈새를 버티는 사유가 이 시에 있다. 불행과 흉터, 어둠을 강요하는 ‘슬픔’을 넘어서기 위한 경계의 사유. “우기에는 슬픈 게 슬픈 걸 찾아낸다 슬픔을 그만 둘 수 없는 자들이 맹렬하게 기쁨을 잃는다"는 인식에는 슬픔의 경계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시인의 자세가 드러나 있다.
슬픔에 옳고 그름의 가치가 있을 수 있을까. 방향성이나 논리성에서 벗어나 있는 슬픔의 감정은 우연성이나 부동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인도하게 된다. “온 힘을 다해 저렇게 흠뻑 슬플 것이다"라는 각오가 만들어 내는 우기의 풍경은 슬픔을 주체의 중심적 대상을 조준한다. 그리고 화자의 시선 안에 정착시켜, 화자가 풍경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에 다른 어떤 정서보다도 유용하게 조작한다.
반대로 이 풍경의 이면에는 대상과의 거리를 지우고, 화자의 감각을 신체 속에 분산시키는 권력적 속성도 내장되어 있다. 즉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욕망이 스며있다는 의미다. 슬픔에 대한 화자의 감각적 요구와 우기의 ‘비’는, 진정한 상호 작용을 형성하는 맥락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화자는 이 풍경 안에서 이미 슬픔의 거리감을 파악하고 오히려 슬픔과의 교감을 시도한다. 즉 이 작품에서의 ‘슬픔’은 역동적이라기보다는 조응에 좀도 무게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그만 둘 수 없는 자"의 심정은 무엇일까. 표현되진 않고 있지만, 화자의 고통과 상처가 지난 자각성 혹은 자위성에 대한 비약은 화자가 차마 건너가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화자의 슬픔이 관통하는 모든 양태의 욕망은 “말 할 수 없"음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화자에게 슬픔은, 분리의 대상이 아니라 ‘나와 타자의 접면’을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가용되고 있는 것이다. 슬픔을 씻어내고 싶었지만 결국 슬픔의 힘으로 버텼다는 고백은 비단 화자만의 것은 아니다. 주인 곁을 지키는 개처럼, 슬픔은 충직하고 성실하게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기의 비는 누적된 상처의 양식이며 풍경으로, 화자는 이 상처, 슬픔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을 것 같다. 시인의 숙명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봄빛은 지극한데
하얀 창가에 국밥집 아이와 에미가 밀담 중이다
아이가 며칠 울더니 오늘은 우는 에미를 달래고 있다
아이가 저리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사랑도 노동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는 일생을 노동자로 살아온 셈이다
내가 사랑을 하였다는 얘기가 아니라
거친 내 일생이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떠들고 있었다
버드나무도 봄빛을 배워 기운이 푸릇한 정이월
명창정궤란 보이는 정갈함을 이르는 게 아니라
거기 백자 같은 여지와 빛의 범람을 말하는 것일 텐데
오늘 아이의 저 스미는 사랑도 그렇게 부르고 싶다
빛은 제 눈이 없어 가리는 곳이 없구나
내가 받은 축복의 전부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비좁은 밥집 안에도 봄빛은 내린다는 사실이었다
얘야 신비롭지 않니 신비롭구나
그런 신비로움엔 기다림 외에 가는 길이 따로 없다
오래전 탯줄 타고 이미 당도해 있을지도 모를
내가 아무리 작아도 줄어들지 않는
또 거기 애틋한 분재 하나 몸 비틀고 있어도 좋으리
아이야
어느 누추한 담장 아래라도 화해야 한다
맑기만 해도 안 되고 충만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맑고 가득하고 따뜻해야 한다
이번 시평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풍경 체험이 단순히 하나의 공간적 경험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의 물리적 배열이며, 미학적 구성임을 살펴보려 한다.
오늘 비는 아무에게나 슬픔을 나눠 준다 우기에는 네 슬픔이 옳았다 오래오래 젖다가 수채화 같은 슬픔이 온다는 말, 몹쓸 흉터에서 잎사귀 같은 불행이 생겨난다는 말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사과나무 가지 끝 풋사과 옆이 무너졌다 나도 저렇게 슬픈 데를 씻다가 무너졌다 슬픔이 없다면 슬픈 게 여럿이던 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없다면 줄곧 믿어왔던 이 많은 책들과 수없이 눌렀던 어두운 버튼들, 맘에 내내 서있던 사람 서랍 속의 흉터들 모두 혼자일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저렇게 흠뻑 슬플 것이다 죽을 것처럼 들고 온 것들, 저렇게 말할 수 없어서 짧게 말할 수 없어서 슬픔은 머리카락이 길고 형용사처럼 영롱하다 우기에는 슬픈 게 슬픈 걸 찾아낸다 슬픔을 그만둘 수 없는 자들이 맹렬하게 기쁨을 잃는다 점 하나 없는 슬픔 언제 그칠까? 주인 곁을 개처럼 지키고 있다
-최문자, 「우기」 전문
삶과 죽음의 이편과 저편, 있는 것과 없는 것, 현실과 내면의 사이, 기쁨과 슬픔의 틈새를 버티는 사유가 이 시에 있다. 불행과 흉터, 어둠을 강요하는 ‘슬픔’을 넘어서기 위한 경계의 사유. “우기에는 슬픈 게 슬픈 걸 찾아낸다 슬픔을 그만 둘 수 없는 자들이 맹렬하게 기쁨을 잃는다"는 인식에는 슬픔의 경계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시인의 자세가 드러나 있다.
슬픔에 옳고 그름의 가치가 있을 수 있을까. 방향성이나 논리성에서 벗어나 있는 슬픔의 감정은 우연성이나 부동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인도하게 된다. “온 힘을 다해 저렇게 흠뻑 슬플 것이다"라는 각오가 만들어 내는 우기의 풍경은 슬픔을 주체의 중심적 대상을 조준한다. 그리고 화자의 시선 안에 정착시켜, 화자가 풍경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에 다른 어떤 정서보다도 유용하게 조작한다.
반대로 이 풍경의 이면에는 대상과의 거리를 지우고, 화자의 감각을 신체 속에 분산시키는 권력적 속성도 내장되어 있다. 즉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욕망이 스며있다는 의미다. 슬픔에 대한 화자의 감각적 요구와 우기의 ‘비’는, 진정한 상호 작용을 형성하는 맥락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화자는 이 풍경 안에서 이미 슬픔의 거리감을 파악하고 오히려 슬픔과의 교감을 시도한다. 즉 이 작품에서의 ‘슬픔’은 역동적이라기보다는 조응에 좀도 무게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그만 둘 수 없는 자"의 심정은 무엇일까. 표현되진 않고 있지만, 화자의 고통과 상처가 지난 자각성 혹은 자위성에 대한 비약은 화자가 차마 건너가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화자의 슬픔이 관통하는 모든 양태의 욕망은 “말 할 수 없"음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화자에게 슬픔은, 분리의 대상이 아니라 ‘나와 타자의 접면’을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가용되고 있는 것이다. 슬픔을 씻어내고 싶었지만 결국 슬픔의 힘으로 버텼다는 고백은 비단 화자만의 것은 아니다. 주인 곁을 지키는 개처럼, 슬픔은 충직하고 성실하게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기의 비는 누적된 상처의 양식이며 풍경으로, 화자는 이 상처, 슬픔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을 것 같다. 시인의 숙명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봄빛은 지극한데
하얀 창가에 국밥집 아이와 에미가 밀담 중이다
아이가 며칠 울더니 오늘은 우는 에미를 달래고 있다
아이가 저리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사랑도 노동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는 일생을 노동자로 살아온 셈이다
내가 사랑을 하였다는 얘기가 아니라
거친 내 일생이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떠들고 있었다
버드나무도 봄빛을 배워 기운이 푸릇한 정이월
명창정궤란 보이는 정갈함을 이르는 게 아니라
거기 백자 같은 여지와 빛의 범람을 말하는 것일 텐데
오늘 아이의 저 스미는 사랑도 그렇게 부르고 싶다
빛은 제 눈이 없어 가리는 곳이 없구나
내가 받은 축복의 전부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비좁은 밥집 안에도 봄빛은 내린다는 사실이었다
얘야 신비롭지 않니 신비롭구나
그런 신비로움엔 기다림 외에 가는 길이 따로 없다
오래전 탯줄 타고 이미 당도해 있을지도 모를
내가 아무리 작아도 줄어들지 않는
또 거기 애틋한 분재 하나 몸 비틀고 있어도 좋으리
아이야
어느 누추한 담장 아래라도 화해야 한다
맑기만 해도 안 되고 충만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맑고 가득하고 따뜻해야 한다
오늘은 춘이월 집으로 오는 길엔
골목 끝에서 아직 거칠게 싸움들이었다
먼지가 일고 헛발질에 입간판이 흔들렸다
말하자면 그들도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좀처럼 가지 않는 겨울과
안달이 난 봄이 되어 뒹굴고 있는 아,
어디에나 있는 빛이다
-박철, 「빛에 대하여」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세상의 질서를 강요하거나 특정한 관념을 고집하지 않는다. 다만 “좀처럼 가지 않는 겨울과/안달이 난 봄"을 모두 보듬고 달래고자 한다. 이러한 풍경은 삶의 궁핍성이나 상실감을 직접적으로 표상하지 않는다.
화자는 우는 에미를 달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여타의 인간적인 감정이 부수적으로 개입되기 어려운, 그 자체의 절대적 풍경을 구축한다. 이는 일종의 유미주의적 엄격성으로 자연스레 발생하는 독특한 이미지다. 화자는 에미를 달래는 아이나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떠들고 있는 자신의 일생이나 기타 행간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들을, 시적 형식과 시적 인식의 연결고리인 ‘봄빛’의 모티프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것은 곧 ‘사랑’이다.
화자는 개념을 규정하거나 넓은 함의로, 시를 풍경 속에 풀어놓지 않는다. ‘비좁은 밥집’과 ‘버드나무’에 대한 감각과 이것들을 연결시키는 정서적 사건, 정서적 연속성으로 시를 유지시킨다. 감각의 연결과 자극의 결합, 공통감각적 지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인식 작용에는 “푸릇한 정이월" “빛의 범람"과 같은 이미지 효과의 요체가 있으며, 화자는 이를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풍경을 조작해내고 있다.
시적 화자의 진술은 경험적 질료와 주체적 정념을 방출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이때 긴장의 여백들은 특정한 내용이나 주제가 아니라 또다른 긴장의 극이 된다. 화자가 “아이의 저 스미는 사랑"을 이야기 하는 행간처럼 말이다. 박철 시인은 사물의 관계성에 의한 존재의 발견을 기술하는데 능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시적 자아의 시선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시선의 확산과 침투를 통해 자기 밖의 세계, 한정된 사물의 존재를 넘어서는 외부를 사유하는 힘을 보여준다. “기다림 외에 가는 길이 따로 없"는 “신비로움"은 그가 의도하는 풍경의 테두리를 완결짓는 시적 주도성을 획득하고 시의 전반에서 기능하게 된다.
화자는 “춘이월 집으로 오는 길"의 풍경을 그려내면서 의미를 부풀리거나 제거하기 보다는 이때의 풍경이 지닌 물질성에 집중하여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이는 풍경의 내면과 화자의 내면으로 즉각적으로 수렴되지 않는 논리적 틈새에서 모호한 여백을 품기 때문이다.
“사랑도 노동"이라는 화자는 자신이 일생동안 “왜 사랑 해야 하는가를 떠들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는 화자가 노래하는 신비로운 사랑을 소박하게 한정시키는 동시에 오히려 그 존재의 배면을 지향하게 된다. 그래서 박철의 시는 조금 더 미시적이고 현상학적이다.
골목 끝에서 아직 거칠게 싸움들이었다
먼지가 일고 헛발질에 입간판이 흔들렸다
말하자면 그들도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좀처럼 가지 않는 겨울과
안달이 난 봄이 되어 뒹굴고 있는 아,
어디에나 있는 빛이다
-박철, 「빛에 대하여」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세상의 질서를 강요하거나 특정한 관념을 고집하지 않는다. 다만 “좀처럼 가지 않는 겨울과/안달이 난 봄"을 모두 보듬고 달래고자 한다. 이러한 풍경은 삶의 궁핍성이나 상실감을 직접적으로 표상하지 않는다.
화자는 우는 에미를 달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여타의 인간적인 감정이 부수적으로 개입되기 어려운, 그 자체의 절대적 풍경을 구축한다. 이는 일종의 유미주의적 엄격성으로 자연스레 발생하는 독특한 이미지다. 화자는 에미를 달래는 아이나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떠들고 있는 자신의 일생이나 기타 행간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들을, 시적 형식과 시적 인식의 연결고리인 ‘봄빛’의 모티프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것은 곧 ‘사랑’이다.
화자는 개념을 규정하거나 넓은 함의로, 시를 풍경 속에 풀어놓지 않는다. ‘비좁은 밥집’과 ‘버드나무’에 대한 감각과 이것들을 연결시키는 정서적 사건, 정서적 연속성으로 시를 유지시킨다. 감각의 연결과 자극의 결합, 공통감각적 지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인식 작용에는 “푸릇한 정이월" “빛의 범람"과 같은 이미지 효과의 요체가 있으며, 화자는 이를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풍경을 조작해내고 있다.
시적 화자의 진술은 경험적 질료와 주체적 정념을 방출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이때 긴장의 여백들은 특정한 내용이나 주제가 아니라 또다른 긴장의 극이 된다. 화자가 “아이의 저 스미는 사랑"을 이야기 하는 행간처럼 말이다. 박철 시인은 사물의 관계성에 의한 존재의 발견을 기술하는데 능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시적 자아의 시선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시선의 확산과 침투를 통해 자기 밖의 세계, 한정된 사물의 존재를 넘어서는 외부를 사유하는 힘을 보여준다. “기다림 외에 가는 길이 따로 없"는 “신비로움"은 그가 의도하는 풍경의 테두리를 완결짓는 시적 주도성을 획득하고 시의 전반에서 기능하게 된다.
화자는 “춘이월 집으로 오는 길"의 풍경을 그려내면서 의미를 부풀리거나 제거하기 보다는 이때의 풍경이 지닌 물질성에 집중하여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이는 풍경의 내면과 화자의 내면으로 즉각적으로 수렴되지 않는 논리적 틈새에서 모호한 여백을 품기 때문이다.
“사랑도 노동"이라는 화자는 자신이 일생동안 “왜 사랑 해야 하는가를 떠들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는 화자가 노래하는 신비로운 사랑을 소박하게 한정시키는 동시에 오히려 그 존재의 배면을 지향하게 된다. 그래서 박철의 시는 조금 더 미시적이고 현상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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