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균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시를 쓰는 시인만의 몫이 아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의 몫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 시인들은 이미지의 허상과 모순을 제거하고 응시와 성찰을 통해 삶의 근원에 접근하는 시적 모험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한밤에 불쑥 솟아나는 나무들을 보았니?
허공에서 떨어지는 새까만, 눈만 흰 새들을?
탕탕 꼬리치며 몰려오는 고래구름들은?
지나가는 바람 냄새에 취하는 아침과 저녁들이 있다
제 살을 씹듯 밥을 먹는 사람들
벽을 안고 춤추다가
벽 속으로 홀연 사라지는 그림자들이 있다
우연과 기적 사이에서
우연처럼, 기적처럼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뭇가지들 타고 오르는 금빛 물고들을 보았니?
한낮의 허벅지에 만발한 장미들은?
성가 속에 번뜩이는 칼과 번개들은?
제 몸뚱이가 유일한 창이며 방패인 것들이 있다
허기를 독으로 바꾸는 것들
객지에 사는 것들
여기가 어디냐고, 내 이름은 뭐냐고 울부짖는
만져지지 않는
흙과 진흙들
-전동균, 「한밤에 불쑥」 전문
서정시의 전통적 미덕은 대상에 대한 따듯한 응시과 교감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동균의 작품에는 자기장과 같은 이런 질서가 존재한다. 누락된 듯한 사회적 관심의 징후는 숨겨져 있고, 스스로 침잠하면서도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암중모색되는 세계가 반성과 기다림의 자세를 통해 더욱 고양된다. 이는 노드롭 프라이(N.Frye)가 제시한 사계의 원형을 인간의 일생과 비교해보면 더욱 또렷해진다.
다수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동균이 선호하는 시간은 항상 저녁이나 밤이다. 한낮의 격정을 겪고 마주한 ‘한밤’과 ‘저녁’은 낮에 관통했던 열망과 좌절을 딛고서 대면해야 하는 시간이며, 인간적 성숙을 다지는 하강의 지점이다.
시인의 시는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외부의 충격에 맞선 내면의 아름다운 응전이라고 보기보다는 본원적으로 내재된 존재론적 문제와의 고투에 가깝다. 상처받는 내면의 풍경을 감상적 상품으로 포장하고 물화적 세계에서 전동균의 시는, 시인이 지닌 정화의 의지를 통해 정체된 틀로 굳어버리거나 동정심에 호소하는 값싼 감정에서 벗어나 있다.
느닷없이 한밤중에 든 화자의 자각은 또다른 징후(symptom)로 채워진다. 징후란 충동과 억압의 타협에 의해 형성되는 것인데, 솟아나는 것과 떨어지는 것, 아침과 저녁, 우연과 기적, 허벅지와 성가, 창과 방패의 열망과 갈등이 일순간 타협하며 형성된 상징으로 수렴된다. 이러한 고도의 상징은 화자를 좌절시키는 현실의 모순과 본원적 고독이 뚜렷이 분출되진 않으나, 독자의 적극적 해석을 요구하며 내적 갈등의 격렬함은 감춰지지 않는다.
또한 “눈만 흰 새들"이나 “몰려오는 고래구름들"이나 “한낮의 허벅지에 만발한 장미들", “성가 속에 번뜩이는 칼과 번개들"은 결국 “허기를 독으로" 바꾸면서 ‘객지’에서 버텨내는 이들을 의미한다. 모두가 “제 살을 씹듯 밥을 먹는 사람들" 변방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눈에 밟히는 부분은 그것들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이다. 새나 구름, 장미, 번개가 모두 ‘들’이라는 복수로 호명되고 있다. 일찍이 키에르케고르는 고독이나 절망, 또는 불안 등을 매개로 실존으로서의 주관적 존재를 단독자로 상정하였는데, 시인은 의식적으로 이러한 단독자의 굴레를 해방시켜주면서 소소한 심리적 위안을 부여한다.
또한 시인의 관심사는 현대라는 비극적 세계와 개체화된 구성원들의 고립 속에서 고독과 삶의 정체를 궁구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노력은 즉물적 묘사의 차원을 넘어 세상에 버려진 듯 절망하는 사변적 영역으로 전이한다. 시인이 “여기가 어디냐고, 내 이름은 뭐냐고 울부짖는" 건너편 세계의 존재를 주시하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여기가 어디냐고, 내 이름은 뭐냐고 울부짖는 만져지지 않는 흙과 진흙들" 전동균의 「한밤에 불쑥」 중에서. 사진=뉴시스·신미식 |
아침 창유리가 흐려지고
빗방울의 방이 하나둘 지어졌네
나는 세 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의 울음을 연습하다가
가장 착해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네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
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을 했네
죄의 목록이 늘어갈수록
물의 방은 조금씩 무거워져
흘러내리기 전에 또 다른 빗방울을 열어야 했네
서로를 할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아린데
물의 혓바닥이 한 번씩 핥고 가면
구름 낀 눈빛은 조금씩 맑아졌네
마지막 빗방울까지 흘려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되어
일상으로 폴짝 내려설 수 있었네
- 길상호, 「우리의 죄는 야옹」 전문
현대 사회에서 훼손된 자신을 치유하는 방식은 그 세계 자체를 인정하고 삶의 척도를 자신의 내면으로 이행시키는 전략을 선호한다. 대부분 관념화된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공감하려고 한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위안과 관계되는데 길상호의 이 작품에서는 고양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죄의 목록"은 늘어가고 “서로를 할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도 늘어나, 고해성사의 고백도 줄고 않고, 더 이상 상처도 아물지 못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화자는 자기 성찰과 각성으로 이를 극복해 나간다.
함께 사는 세 마리의 고양이와의 교감을 통해 화자는 서정적 통합을 경험하고 이를 현실의 삶을 치유하는 동력으로 활용한다. “오늘의 울음을 연습"하고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그것이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기도문을 새"기는 행위를 통해 화자는 “비로소 우리가 되어/일상으로 폴짝 내려설 수 있었네" 라고 고백을 한다.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화자는 억압된 현실과 불편한 죄의식들을 행간에 풀어내놓고 있다. 이는 삶의 맹목 속에서 결코 충족되지 않는 근원성에 대한 회의를 스스로 더듬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복잡다단(複雜多端)한 현실 속에서 고양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서정의 구조는 현대 사회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본질 훼손에 맞서, 당위적 현실로 갱생해내려는 의도가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성찰은 윤리적 혹은 존재적 자기 검증을 새로운 서정의 한 갈피로 인도한다.
길상호는 일상에서 지나쳐버리기 쉬운 삶의 한 지점에서 낮은 자세로 눈을 맞추고, 그것의 숨겨진 이면과 지층처럼 축적된 의미들을 발견해 스스로를 비춰본다. 이는 우리 시단에 번지고 있는 일체의 유행을 거부하고, 뚜렷한 자기중심을 통해 획득하고 있는 새로움이며 시의 활력으로, 대상에 대한 견고한 애정과 재문맥화된 시적 전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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