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민환. 고려대미디어학부 명예교수. 장편소설 ‘담징’(서정시학 2013), ‘눈 속에 핀 꽃’(중앙북스, 2018)을 썼다.
필자는 신간(新刊)책을 접할 때 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김민환(金珉煥·76)의 장편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문예중앙)도 그러했다. 596쪽의 두툼한 책 속에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작가의 이력은 간단명료했다.
“순리를 위한 일이라면 역풍을 뚫고 날아가는 분."
“봉강 정해룡 일가의 삶을 통해 현대사를 성공적으로 조명한 소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과 최동호 고려대 명예교수(시인)의 추천사에서 소설의 내용을 예견할 수 있었다. 이어진 ‘작가의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친구가 주소록을 들고 원등마을로 나를 찾아왔다...나는 그를 통해 그의 집안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화려하고도 기구했다. 그의 가족사 한 토막을 소설로 낸다."
그러면서 김민환 작가는 “다양성이 넘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거기서 다양한 의견이 샘솟는다. 서로 다른 의견은 구르고 부딪치며, 어울려 조화로운 공론으로 거듭나야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좋은 사회는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간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는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조화로운 공론으로 거듭나지 못한 채 비산(飛散)되고 있다. 현대사의 아픔 속에서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소설의 주인공 봉강(鳳岡) 정해룡(丁海龍, 1913-1969)은 누구일까. 그는 1913년 7월 2일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정종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봉강리에서만 13대가 살아온 영성 정씨 문중의 종가로 삼천석지기였다. 그는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소설은 400년을 이어온 기와집 ‘거북정’을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하나하나가 현대사의 아픔 속에서 벌어지는 질곡(桎梏)의 삶이었다.
“형님, 해방이 됐대요."
“아니, 뭣이라고?"
“어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해서 우리가 해방이 됐다고요."
사람들이 뒷산으로 몰려갔다. 사람들은 신사(神社)에 불을 질렀다. ‘일제에 빌붙어 양곡을 빼앗아가던 놈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은 또 다른 숙제들을 몰고 온다. 건국준비위원회(건준)도 생겨났다. 급변하는 상황에서 봉강의 부인이 죽음을 맞는다. 장례식장에서 ‘송정 박태규’가 봉강에게 말한다.
“자네도 알겠지만 공산당이나 소련을 제일 싫어하는 분이 백범 김구선생이시네. 우리나라가 동족상잔으로 초토화하는 것만은 막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네."
“이 자리에서 제가 정치문제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으요. 그러나, 한 마디만 한다면, 참말로 가슴 아픈 일이 있소. 저는 좌우가 합작하기를 바랐는데, 좌우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지고, 거기다 우는 우대로 좌는 좌대로 자꾸 갈라지고..."
후일 송정이 봉강 정해룡에게 한 말이다.
“여보게 봉강. 나는 중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들어오시고, 미국에서 우남 이승만 박사가 돌아오시면, 서울의 몽양 여운영 선생과 함께 통일된 독립 국가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네...그런데, 세분이 서로 불목하다가 끝내는 몽양이 암살당되더니 백범도 당하고...우남이 남한을 맡았지만 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지금 나라꼴이 말이 아니네."
남북 분단은 가슴 아픈 일
“남북 분단은 이제 불가피한 현실이에요. 이러한 때 남반부에서 미군정에 대항하기 위해서 좌익 단일대오를 갖춰야 해요."
“분단을 막아야지 분단을 맞이할 수는 없지. 아직은 좌우 대통합의 꿈을 버릴 계제가 아니여."
결국은 월북을 하게 되는 동생 해진과 해룡은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봉강은 난생처음으로 보성과 장흥 경계에 있는 ‘돗지기’까지 갔다.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쳤다. 동생 해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파도야, 너희는 꼭 우리 형제를 닮았구나.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치는 구나.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면서도 끊임없이 부딪쳐서 부서지는 구나.>
정해룡은 이승만이나 김성수를 지지하지 않았다. 물론 박헌영도 아니었다. ‘좌우 통합과 남북통일이 절실하다’는 생각해서 여운형의 근민당에 들어갔던 것이다.
<1956년에는 직선으로 정·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었다. 집권 자유당은 3월 26일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을 만장일치로 정·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4월 25일에는 민주당 신익희 후보와 무소속 조봉암 후보는 정권 교체를 위해 적절한 시기에 신익희 후보로 단일화 하기로 합의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정권교체라는 숙원이 이루어질 것 같다는 희망이 익어갔다. 그러나, 5월 2일 신익희 민주당 후보가 호남지방 유세를 하다가 뇌일혈로 쓰러졌다.>
선거가 끝나자 정부는 진보세력에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1957년 11월 5일 이른 아침에 형사 둘이 거북정으로 왔다.
“왜 나를 잡아가겄다는 것인가?"
“우리는 몰라요. 서울로 압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봉강의 자식들은 신원조회에 걸려 공직에 나가지 못했다. 나라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나라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둘째아들 건상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철도기관사 시험에 합격했다. 소설은 이 부분을 이렇게 썼다.
<절대로 고개를 들지 말자. 고개 숙이고 철길만 보고 살자. 그는 그것이 순명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봉강은 손문의 삼민주의 신봉자
1969년 봉강은 대중당 중앙당의 훈련원장이 됐다. 그 해 7월 봉강은 당(黨)간부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중국 손문 선생이 주창한 삼민주의를 본받아, ‘민족주의·민주주의·민생주의’ 셋을 축으로 삼는 삼민운동을 펴는 것이 진보세력의 당면과제라고 역설했다.
봉강은 어느 날 혼자서 일림산(664m)에 올랐다. 며칠 전에 비가 내려선지 계곡물이 콸콸 흘렀다. 청주목사를 마치고 낙향한 반곡 정경달(1542-1602)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무엇이 반곡 할아버지를 울화의 늪에 빠트렸을까. 나라의 이익보다 당파를 좇아 찢길 대로 찢긴 세태에 화가 났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패거리를 짓는데 혈안이었다. 제 패거리가 아니면 따돌리고 내쳤다. 패거리를 내세워 대궐 앞에서 떠들게 하고, 상소 올리게 하고, 다른 쪽 패거리에 욕설을 퍼붓게 했다. 삼고초려도, 탕평도, 그저 말로만 했다.>
1969년 10월 25일 봉강이 쓰러졌다. 경운기에서 택시로 바꿔 읍내의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봉강은 인품이야 훌륭하지만, 시대를 거스른 분이 아니여?"
“천만에. 순하디 순하게, 그야말로 순리대로 사신분이여."
“순즉역(順則逆)이요 역즉순(逆則順)이라. 순리를 따른 것이 거스른 것이 되기도 하고, 거스른 것이 순리가 되기도 하제."
봉강의 추모비 제막식(1995년 3월 16일)에 온 이들이 봉강을 사찰하던 전직 형사 임성직과 나눈 대화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난다고 하잖는가? 이 어른은 순리를 위한 일이라면 역풍도 뚫고 날아가는 그런 분이셨어."
김민환 작가는 ‘지수’는 실존이 아닌 가상인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설은 ‘지수를 통해 마무리된다.
<지수는 백사장을 걷다가 눈을 들었다. 물새 한 마리가 홀로 바람을 거슬러 하늘을 날고 있었다. 지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물새가 날아 까마득한 곳에서 하나의 점이 되었다가 끝내는 노을 속에 묻혔다. 이윽고 노을이 바다로 내려앉았다. 득량만(得粮灣) 봄 바다에서 붉은 윤슬이 일렁였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을 말한다. 필자가 김민환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소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답변을 그대로 옮긴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10대강국 선진국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경제지표로 보면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아직도 좌(左)패와 우(右)패로 대쪽처럼 쪼개져있습니다. 새로 바뀐 여야 지도부의 말을 들으면 살기가 등등합니다. 상대는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 척결의 대상입니다. 보듬는 정치는 실종된 지 오랩니다. 지금 다시 14연대반란이 나거나 6·25가 터진다면, 정규군끼리 붙는 전쟁이 아니라 날뛰는 자들이 펼치는 살육전(殺戮戰)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될지 끔찍하지 않습니까?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로 보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 봉강 정해룡 선생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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