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 3사로 채널선택권이 제한적인 시절엔 드라마 작가들이 표현의 자유에 목말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종편채널과 OTT(Over The Top)등으로 콘텐츠 플랫폼이 다양해지며 작가들의 창조성과 표현의 자유 또한 확보된 반면 콘텐츠의 무한경쟁으로 선정성과 폭력성을 표현의 자유로 포장하고 미화해 시청률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또한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거대자본과 거대 컨텐츠 시장이라는 당근을 앞세워 ‘지구촌 어디에서도 먹힐 수 있는 K드라마 제작’의 조력자로 K드라마의 무국적 몰개성화에 ‘열일’하는 막후세력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도 고민해 볼 일이다"

“지미는 여덟 살 어린 아이인데 3대째 헤로인 중독자다. 고수머리에 부드러운 갈색 눈을 가진 조숙한 이 흑인 소년의 가냘픈 팔에는 많은 바늘 자국이 반점으로 남아있다. 주삿바늘은 지미의 부드러운 살갗에 마치 방금 새로 구어 낸 케이크 한 가운데에 빨대를 찔러 넣듯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1980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 기자 재닛 쿡(Janet Cooke)의 ‘지미의 세계’라는 제목의 기사 도입부다. 이 기사에 의하면 지미는 마약중독도 모자라 엄마가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지미는 다섯 살 때부터 마약중독자였는데, 엄마와 동거 애인이 헤로인을 맞는 것을 보며 호기심에 중독자가 됐고, 외할머니도 중독자였으므로 결국 헤로인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가 보도되자마자 워싱턴 DC는 충격에 빠졌고 시장을 비롯한 시민들은 이 불쌍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불쌍한 흑인 소년 지미는 끝내 구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상상력 충만한 기자’의 ‘표현의 자유’가 빚어낸 ‘대참사’였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물론 특종 스트레스로 가짜 기사를 지어낸 재닛 쿡 기자는 기자직에서 물러나고, 이 기사로 받은 퓰리처상은 취소됐지만 말이다.

 
그러면 ‘사회문제의식이 투철한’ 드라마 작가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플랫폼을 만나 ‘소재주의’에 빠지면 어떤 드라마가 나올까?
 
아마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인간수업’(진한새 作)같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19금 드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 속 주인공들 같은 10대들이라면 이런 19금쯤이야 사뿐히 뭉개고도 남지 않을까?
 
‘돈을 벌기 위해 죄책감 없이 범죄의 길을 선택한 고등학생들이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과정을 그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라는 제작팀의 설명처럼 얼굴 없는 랜선 포주 오지수(김동희 분), 조건만남 매음소녀 서민희(정다빈 분), 절도는 기본에 포주 동업을 자처하는 배규리(박주현 분), 여자 친구인 서민희가 주는 돈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학교 일진으로 패거리를 몰고 다니며 폭력을 일삼는 곽기태(남윤수 분)까지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 그야말로 ‘1’도 없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범죄사실의 ‘발각에 대한 두려움’과 약자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적개심과 복수심’ 뿐이다.
 
이들의 나누는 일상의 대화는 비속어로 시작해 비속어로 끝나고 이들을 둘러싼 모든 일상의 공간은 범죄 현장이다. 학교, 교실은 물론 집까지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공간에 있는 ‘어른’ 들은 ‘꼰대’아니면 ‘공범’이다.
 
‘꼰대’들은 이들을 범죄의 세계로 몰아넣고, 잘도 속아 넘어가고, 의미도 없는 말만 늘어놓는다. 물론 작가의 의미 있는 배치와 설정이겠지만 그 인물을 시청자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드라마 어느 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오정진(박호산 분)은 아들 오지수를 버리고 혼자 살아가게 만든다. 그뿐인가 아들이 포주 노릇을 하며 벌어둔 6천만 원이 넘는 큰돈(대학을 갈 때까지의 생활비 학원비 등)을 찾아내 어떻게 생긴 돈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훔쳐 달아나 인터넷도박으로 날려버린다. 반면 조혜연(심이영 분)과 남편은 병적이라 할 만큼 엘리트의식에 사로 잡혀 외동딸 배규리를 틀에 가두고 압박하는 교육으로 범죄의 길로 인도한다.
 
담임 조진우(박혁권 분)는 그나마 이 드라마 속 어른 들 중 가장 어른다운 어른이지만 ‘성적이 좋은 모범생’이라는 색안경으로 오지수와 배규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정작 봐야할 것을 놓치고 있다. 여성청소년과 소속 형사 이해경(김여진 분) 역시 감과 열정만 있을 뿐 결정적 증거나 해결법 없이 이들을 자극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가장 큰 뜬금포 핵폭탄은 이왕표라는 인물이다. 오지수 밑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는 퇴역군인 출신 실장 이왕표(최민수 분)다. 이왕표는 노숙자 시절 일진에게 괴롭힘 당하는 오지오를 구해주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폼나게’ 떠난다.(며칠 굶은 노숙자 처지에) 드라마 상 단지 이것을 인연으로 이후 포주 오지오의 충직한 해결사 실장 노릇을 한다.(이것도 사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그리고 오지오를 구하고 조폭 보스를 그야말로 ‘묵사발’을 만들어 놓고 자신도 죽는다. 이왕표는 도대체 왜 포주 오지수의 충견이 되었을까?
 
뭐 ‘인간수업’이라는 드라마를 선택하면서 ‘사랑의 꽃피는 나무’ 류의 청소년 드라마를 기대하는 시청자들은 없겠지만은 적어도 ‘인간수업’의 작가가 이 드라마를 통해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시청자들은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회부터 10회까지 잔인하고 선정적인 ‘범죄 고발 보도 프로그램’을 본 것 같다. 제작진의 설명처럼 ‘돈을 벌기 위해 죄책감 없이 범죄의 길을 선택한 고등학생들이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과정’만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게 그려져 있지 그들이 그렇게 선택하게 된 심리상태나 행동이면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수업’의 등장인물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작가가 설정해 놓은 스토리의 동선(動線)을 따라 작가가 정해 둔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숨 막히게 달려갈 뿐이다. 매회 난무하는 복수혈전과 피를 부르는 자극적인 사건으로 시청자를 긴장시키고 호기심을 유발해 시청자의 시선을 잡아두는 데까지는 성공적이다.
 
그러나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명품드라마는 아니라는 사실을 시청자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드라마 ‘인간수업’에는 감동도 그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 어찌할 수 없는 파국을 보는 고통만이 남는다, 그냥 흥행에 성공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드라마일 뿐이다.
 
공중파 3사로 채널선택권이 제한적인 시절엔 드라마 작가들이 표현의 자유에 목말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종편채널과 OTT(Over The Top)등으로 콘텐츠 플랫폼이 다양해지며 작가들의 창조성과 표현의 자유 또한 확보된 반면 콘텐츠의 무한경쟁으로 선정성과 폭력성을 표현의 자유로 포장하고 미화해 시청률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또한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거대자본과 거대 컨텐츠 시장이라는 당근을 앞세워 ‘지구촌 어디에서도 먹힐 수 있는 K드라마 제작’의 조력자로 K드라마의 무국적 몰개성화에 ‘열일’하는 막후세력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도 고민해 볼 일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재닛 쿡이 퓰리처상을 받은 것도 부당하지만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도 부당하다는 말로 풍부한 상상력으로 감동적인 거짓 기사를 지어낸 기자 재닛 쿡을 비꼬았다. 재닛 쿡이 기자가 아니라 드라마 작가였더라면 미국식 막장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시리즈 ‘인간수업시즌2’가 명품드라마로 돌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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