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전남 여수에서 에이즈에 대한 공포감이 확산되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에이즈 보균자로 판명된 20대 후반의 여성이 18개월 동안 여수역 부근 집창촌에서 수백 명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상대한 손님의 절반 정도가 콘돔을 쓰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에이즈 감염 여부를 문의하는 전화가 여수시 보건소에 빗발쳤다.
이 사건은 ‘작은 세계’(Small World) 이론을 유감없이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서양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다섯 다리만 건너면 어느 누구와도 안면을 틀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서로 모르는 두 사람, 가령 서울의 미녀와 뉴욕의 백만장자도 다섯 다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인류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될 정도로 지구가 비좁다는 의미에서 작은 세계 현상이라 불린다.
2004년 1월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는 한국사회의 연결망(네트워크)을 조사한 결과 한국인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3.6명만 거치면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리는 까닭도 유권자들이 자기 고향 출신을 뽑아놓으면 두세 다리만 건너도 청와대에 줄을 댈 수 있다고 막연히 기대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작은 세계 현상은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네트워크 과학(Network Science)이라는 새 학문을 태동시켰다. 네트워크 과학은 인체, 인터넷, 인간관계 등 세상의 모든 것을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로 보기 때문에 연구 주제는 끝이 없다. 예컨대 전염병 연구에 작은 세계 이론을 적용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01년 6월 ‘네이처’에 성관계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 스웨덴 스톡홀름대의 사회학자들이 미국 보스턴대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작은 세계 개념으로 성관계의 연결고리를 분석하고 에이즈, 음부포진, 매독과 같은 성매개 질병이 전파되는 양태를 밝혀낸 것이다. 이들은 2,810명의 스웨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상대와 성관계를 가졌는지 조사하고, 스웨덴 사회에서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몇 다리를 건너 연결돼 있는지를 알아냈다. 결론적으로 스웨덴 사람들은 성적 관계에서 어느 누구도 두세 다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요컨대 성적으로 아무리 모범적인 시민일지라도 에이즈 보균자 등 성매개 질병에 감염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안심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임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몇몇 사람이 성관계 연결고리의 많은 부분을 점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환자 제로’(Patient Zero)에 의해 뒷받침된다. 전염병의 최초 발병자이자 전파자를 환자 제로라고 일컫는다. 미국에서 에이즈 확산 속도를 빠르게 한 장본인이 환자 제로이다. 그는 국제항공 노선의 남자 승무원이었는데, 전 세계의 사우나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문란한 성관계를 가졌다. 미국 최초로 에이즈 환자로 진단 받은 남자 248명 중에서 적어도 40명이 그 승무원 또는 그의 예전 상대와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 에이즈 감염자는 약 4600명이다. 대부분 성행위를 통해 감염됐다. 젊은이 여러분, 콘돔을 손수건처럼 준비하고 다니시길. 출처=조선일보 '이인식의 멋진 과학' 2007년 5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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