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너무 흘러 자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정거장’과 ‘편지’가 시제(詩題)였을 것이다. 1986년 경상남도 학예발표회는 어느 학교의 교실과 강당을 빌려 진행되었고 고등학교 운문부 참가자였던 나는 교실에 앉아 두 제시어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정거장을 택했다. 그날 나는 아침 일찍 울산에서 출발해 여러 정거장을 거쳐서야 학예회장에 도착한 때문이다. 또 어쩌면 강원도 삼척에서 경북 봉화로, 경북 봉화에서 다시 경남 울산으로 남행을 거듭한 이력은 내게 이미 정거장을 익숙한 시어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편지’는 아무래도 혈기 방장한 문청(문학청년)이 선택하기에 약간 낯간지러운 시제였다. 대중가요와 방송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로 빈번히 등장한 탓에 시적으로는 식상한 감도 없지 않았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라는 어니언스의 노래(작사 김미선ㆍ작곡 임창제, 1973)나 청춘스타 김자옥(1951-2014)의 「사랑의 계절」과 같은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인해 ‘편지’를 갖고서는 도저히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착상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외양의 화려한 수사적 겉멋과 수상(受賞)의 거드름만 가득 찬 얼치기였지만 그래도 그때는 패기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아무튼 갱지 첫 줄 한가운데에 ‘정거장’을 크게 써놓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편지보다는 나앗겠지만  정거장이라 해도 정해진 시간 안에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시로 적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볼펜을 돌리며 이리저리 궁리를 하며 한참 동안 끙끙 앓았다. 그러다 문득 “길 잃은 포성 몇이 날아온다."는 시구가 떠올랐다. 분명히 말하지만 떠올린 게 아니라 떠오른 것이다. 시적 언어는 시인이 아니라 시어가 발화의 주체이다. 그래서야 그것은 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포성’(砲聲)은 부차적 언어다. 우두머리 시어는 ‘길 잃은’이다. 정거장은 길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길 잃은’은 정거장이란 시제에 의미 맥락상 부합하는 언어였다. ‘길을 잃었기’ 때문에 ‘날아온다’는 단어도 성립되는 것이고, ‘길을 잃었기’ 때문에 ‘포성 몇’도 가능해진다. 이미지와 의미의 맥락이 서로 조응하는 시적 구성이 갖추어지는 셈이었고, 무엇보다 ‘길 잃은’과 ‘포성’은 시제인 정거장에 의미의 심도를 높이는 느낌도 주었다.

  

  

     길 잃은 포성 몇이 날아온다.

     더러 들풀처럼 일어서는 바람과
     임진강변 청청한 하늘로
     그 시절 아픔들이 되살아온다.
     - 졸시, 「정거장」 중에서

  

  

“길 잃은 포성 몇이 날아온다."는 표현은 ‘정거장’에 매우 적확한 이미지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전쟁과 이산과 분단이라는 민족사적 현실과도 부합했다. 형식과 내용, 혹은 소재와 주제의 측면에서 딸깍 소리를 냈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생생하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절반이지만, 그날 운문부 교실에서 있었던 ‘착상’은 거의 모든 것이었다. ‘들풀처럼 일어서는 바람’이라느니 ‘임진강변 청청한 하늘’과 같은 시청각 이미지들과 더불어 ‘그 시절 아픔’이라는 주제적 언급은 매우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작품성을 떠나 제출할 작품의 얼개는 거의 모두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정거장을 민족의 이산과 재회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착상하고, 거기에 전쟁과 분단과 이산의 고통을 가미시켜 어떤 시적 정서를 창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표의적 수준을 넘는 경험과 고통의 공유가 없는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더 이상 깊게 들어갈 수 없었다. 김종삼(1921-1984)의 「민간인」이나 문병란(1935-2015)의 「직녀에게」와 같이 민족 현실을 다룬 빼어난 작품이 적지 않지만, 시란 드러난 언어적 의미를 넘어 한 시대의 어떤 보편적 정서에 가닿는다고 할 때의 그 심층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아직 어린 문청이었던 탓도 있고 학예발표회라는 제한된 조건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적 성공에 우연이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분단과 이산과 대결을 본질로 하는 민족 현실은 이미 일정한 추상화 단계에 진입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이란, 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공산주의로 그에 맞선 남한은 민주주의로 정치적 신념과 이념적 대결을 결행했던 것이라고 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일선에서 싸운 국민들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걸린 절체절명의 생존 문제였다. 전투에 나선 병사와 전장을 피해 논밭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은 정치도 이념도 무엇도 아닌 오직 고통스런 현실일 뿐이었다. 이 같은 현실로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분단과 이산과 남북의 대결은 계속해서 이념화, 추상화되었기에 전후 세대들은 ‘착상’을 넘어서는 핍진한 민족 서정에 도달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모두 정거장에 와 있다.
     이제는 신의주행 밤차를 타야 한다.

     판문점 행 차량들은 통일로를 달리고
     휴전선 지나면
     평양까지는 1차선 신작로가 누워 있다.
     - 졸시, 「정거장」 중에서

  

  

그해 경상남도 학예발표회 고등학교 운문부 심사 결과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겉멋을 넘어서는 내면적 성숙과 치열한 사유를 감당하는 데 입상(入賞)은 결코 유익하지 않다는 명백한 사실을 특기한다. 세월과 더불어 깊이 무르익은 영혼의 진실이 깃들지 않은 시는 때에 따라 사람을 해치는 독이 되어 왔거니와 어린 나이의 수상 실적들은 나를 한낱 천박한 기교적 잔재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진지한 성찰이 없던 문청은 더 나아갈 곳 없는 백 척 절벽에서 그 순간 한 발짝 수직으로 내디뎠던 것임을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는데도 민족 현실은 변한 게 없다.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국방위원장은 이미 여러 차례 만났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도 만났지만 더없이 화려한 이벤트 뒤에도 민족 통일은 여전히 요원한 느낌이다. 통일방송을 추진한다며 수년간 연구에 매달렸고,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실제로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했던 한 선배는 어느 날 솔직히 고백했다. “이런 구조 위에서라면 내가 죽기 전에는, 아니 내가 죽은 뒤에도 통일은 불가능하다." 그는 대동강변 한 호텔 객실에서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통곡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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