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대중적인 예술가 중 하나’라는 전혀 알지 못하는 화가의 전시회를 보러 가는 길은 예와 다르지 않았다. 평일 한낮임에도 덕수궁 대한문(大韓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자동차를 피하는 사람들, 남자들, 여자들, 연인들, 부부들… 그 끝에서 서울시립미술관은 입장권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을 아주 길게 줄 세워 놓고 있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의 회화, 드로잉, 판화 133점이 전시된 아시아 지역 첫 대규모 개인전이라고 했다. 2018년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무려 9030만 달러(약 1019억 원)에 낙찰돼 가장 비싼 그림´으로 유명세를 떨친 「예술가의 초상(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의 작가이자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접근 방식으로 2차원 평면에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가며 작품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화가라고 했다. 그가 바로 서울시립미술관 매표소 앞을 사람들로 가득 채운 주인공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적도 없고, 작품전도 이번이 처음인 영국 브래드포드 출신의 이 노작가가 어떤 매력으로 많은 애호가의 사랑을 받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적지 않은 금액을 쓰려는 사람들이 금요일 오후 3시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그들은 중년이나 노년의 관람객이 아니라 분명 젊고 앳된 청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앳된 남녀 혹은 젊은 연인들은 줄을 서서도 즐겁게 얘기하며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릴 줄 알았다.
그에 앞서 나는 이 정보 폭주의 시대에 ‘세계 경매가 최고액’을 기록했다는 뉴스를 흘려들은 적이 있고, 지하철역에서 짧은 순간 전시회 홍보물을 본 적이 있다. 꼭 어디선가 본 듯한 수영장 이미지의 그림, 데이빗과 호크니의 어감과 조화,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권위는 미술이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꼭 관람해야지’라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런 내게 매표소 앞의 인파는 놀라움을 넘어 전혀 다른 별세계의 한 양상처럼 느껴졌다. 수년이 흘러도 초판 1000권이 다 판매되지 않는 시집 유통의 세계와 장사진을 이룬 미술 전시회의 풍경은 사뭇 대비되는 것이었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전시장 내부는 더욱 붐볐다. 특히 입구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기’를 테마로 한 일련의 작품이 전시된 구역에는 관람객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기까지 했다. 유명한 수영장 그림 「더 큰 첨벙」(1967)이 전시된 ‘로스엔젤레스’ 구역이나 ‘자연주의를 향하여’, ‘푸른 기타’, ‘움직이는 초점’, ‘추상’ 등 전시 구역마다 사람들이 넘쳐났다. 조용한 관람은커녕 시끄러운 관람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관람객들은 전시장 안에서 겹겹이 줄을 서서 이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대가의 작품을 기쁘게 감상했다.
세 개의 전시장 사이 연결 통로에서 관람객들은 기념 컷 혹은 인증 샷을 찍었다. 입장권과 소형 팸플릿을 카메라 앞에 들어 올린 채 고개를 약간 기울여 ‘비대칭의 대칭’으로 사진을 찍었다. 젊은 관람객의 밝은 표정과 기록 욕구는 복잡한 전시장 내부의 불친절한 환경과 대비되어 단연 돋보이는 영상이었다. 그들은 마치 복잡함을 즐기는 듯 서로에게 밝은 에너지를 전하는 것으로 보였다. 데이비드 호크니전이 열린 서울시립미술관은 어쩌면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의 ‘활기찬 에너지’의 전시로 볼 수도 있었다.
호크니는 그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말했다.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고. 그의 고향 이스트 요크셔에서 수년간 그리고 있는 풍경화의 모티브는 바로 자연의 힘이라고. 만년의 그는 요크셔 풍경을 거대한 화면으로 그린 것을 포함해 미국 그랜드 캐니언의 모습도 강렬한 색감의 대작으로 그려 놓았다. 수채화와 유화, 석판화와 에칭 등 기법적 다양성은 물론 추상표현주의에 반기를 들고, 「난봉꾼의 행각」으로 18세기 영국을 풍자하고, 「푸른 기타」 시리즈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오마주하고, 디지털 카메라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는 등 60년이 넘는 경력의 말미에는 ‘자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복잡한 전시장의 불친절한 관람 환경에도 불구하고 젊은 애호가들의 다소 과장된 기록주의와 매표소 앞의 기나긴 줄도 일종의 ‘자연의 힘’으로 긍정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만년의 호크니가 다시 고향 들녘과 나무와 풀을 반복해서 그리는 의욕과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세상의 유행이나 유랑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것 아니겠는가. 어쩌면 진정한 ‘자연의 힘’은 숱한 규범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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