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감정을 서술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시인은 감정을 표현할 뿐이지, 그것을 지시하거나 기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서 형용사의 사용이 왜 위험한 일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형용사가 남용되고, 시인의 감정이 독자에게 강제되고 있는 작품들의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노련한 시인은 기본적으로 감정을 서술하는 비(非)표현적 행위 대신에 자신의 시상에 특정한 감정들의 이름표를 붙이지 않는다.
시인이 감정을 서술하는 것은 과학적 용어들의 존재나 증명과 같은 도리의 일이며, 독자에게도 관심 밖의 일이다. 흔히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일반화(generalize)시켜 독자에게 전달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의 사물을 하나의 개념 혹은 하나의 감정에 종속시키고 분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화(individualize)하고자 한다.
좋은 시인은 감정에 대한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의 개별화에 심혈을 기울인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러한 본보기로 적당한 두 편의 시들을 골라 살펴보고자 한다.
꾹 꾹 누른다고 터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러 번 눌러본 사람
밖으로는 고요히 숨이 머문 듯하지만
청력이 좋은 사람은 듣는다
이렇게 작은 살점의 깊은 곳에
저 먼 사막의 가뿐 호흡이
재빠르게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다시 꾹 꾹 눌러 그 깊은 안을 불러보면
절대의 사랑과 영원이 천둥치듯
내 한 손을 허공 위로 쳐들게 한다는 것
사막이 아니라 숲이었다는 걸
생명이 뛰논다는 것
한 번의 죽음으로 영영 안 보이는 사람보다
이 긴 긴 생명으로 남은 씨앗
이 작은 것의 이름은 우주
한 번의 죽음으로 깨워도 불러도 소리 없는
손톱길이만한 인간의 생보다야
아슴한 골목길을 휘돌아 가고 있는 씨앗
이어가고 다시 이어갈 것이라 해도……
나 언제 씨앗처럼 몸 줄여 움터
이파리 하나 뻗어
땅속에 그 목소리 스칠 수 있겠나.
- 신달자, 「씨앗」 전문
화자가 ‘씨앗’ 하나에서 “절대의 사랑과 영원"을 발견하고, “숲"을 보고, “우주"를 호명할 수 있는 것도, 시인이 사물의 내부에서 감각의 직물을 이뤄내며 그것들을 존재의 진동으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적 추구의 본질은 가시적인 세계에서 불확정적인 것들의 모호함을 들춰내는 것이다.
화자는 “작은 살점의 깊은 곳"을 달려오는 “먼 사막의 가뿐 호흡"을 찾아낼 정도로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고, “아슴한 골목길을 휘돌아 가"는 씨앗 안에 흐르는 속울음마저 듣는다. 이때 시인은 사실적인, 그리고 가능한 감각들 간의 관계 사이에서 자신만의 사고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사실적 느낌을 명시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지만 특정한 방식을 통해 과거에 가졌던 느낌을 재생하는 방식을 차용한다.
화자는 스스로를 “나는 여러 번 눌러본 사람"이라 하면서 “손톱길이만한 인간의 생"의 경험과 감각을 시행에 녹여낸다. 시인이 감각하는 것과 기억하는 느낌의 관계는 무한에 가깝도록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시인은 사실적이고 가능한 감각들 간에 관계에 대해 그의 사고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세계, 서로의 바깥에 있는 것들의 세계에 산재해 있는 경험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하여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화자를 통해 속삭이는 “저 생명의 캄캄한 땅속에서/나 언제 씨앗처럼 몸 줄여 움터/이파리 하나 뻗어/땅속에 그 목소리 스칠 수 있겠나"라는 귓속말은 감각과 감정의 관계 사이에 관여하면서 독자에게 스며들게 된다.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 행위에서 대상에 대한 사고는 경험의 한 요소로서, 그것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차적 형태의 사고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느낌에 대해 생각하며 그들간의 관계를 탐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화자가 ‘씨앗’을 대상으로 펼쳐 보이는 일차적 형태의 사고 활동이 느낌들 간의 관계로 심화되고 확대되면서 독자들에게 정서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씨앗’에서 ‘죽음’과 ‘생명’, ‘우주’와 ‘사랑’, ‘영원’을 사고하며, 그것들 간의 관계를 긍정하는 것은 단순히 시인이 자연의 세계나 감각의 세계와 확연히 분리된 신비하고 초월적 세계의 법칙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감각의 경험을 호소하고자 한다.
신달자 시인은 시인의 모든 사고와 표현이 경험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전제적 명제에 대해, 경험이 아니라 경험적 사고에 기초한 신비한 의미의 감각이라는 추론을 가능함을 작품으로 증명하고 있다.
지하철 안은 뉴스의 광장이다
신사역을 지나자 내 옆의 아낙네가 비선실세니 뭐니,
압구정이 가까워 오자 ‘순실이는 왜 청문회에 못 세워!’
촛불집회가 횃불시위로 입방아는 이백 미터에서 백 미터까지
입속에 까칠한 바람을 삼키며 옥수역에 내린 사람들 사이로
꿈을 새치기해 간 세월 저편에 너의 진심이 마중 나온 듯
구슬을 머금은 것 같아, 속삭이던 푸른 귓바퀴가 쫑긋 선다
한달음에 닿을 수 없는 촉촉한 문장을 쓰다 지우고
왕사탕 살살 녹여먹자 해놓곤 먼저 으깨버린 약속
잽싸게 출구를 빠져나간다
시인은 모두 사디스트라던 어느 마조히스트의 웃음을 노선에 눕히고
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상처를 주는지 고문하고 있다
그들만의 관계를 나 혼자 중얼대며 광장과 금호 약수를 지나
먼 훗날 얘깃거리가 안개 속 터널을 빠져나온다
- 오현정, 「옥수역玉水驛을 지나는 독백」 전문
시인은 스스로의 각성을 현실로 직접 옮기지 못하는 소시민적 삶 속에서의 내면 풍경을 주시하고 있다. 배타적인 양심과 속물적인 연민과 위선적 도덕 대신 각성의 내면이 그려내는 풍경을 통해 삶의 무력함에 집중한다.
화자는 이야기하는 “꿈을 새치기해 간 세월 저편에 너의 진심"과 “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상처를 주는지"에 대한 고민,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 “좋았던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여전한 의문에 답을 구하지도 못하고 이러한 의문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이 시의 또다른 매력은 화자가 내보이는 내면의 궤적 이외에 이 작품에 활용된 시인의 감각에도 있다.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차갑거나 딱딱하거나 촉촉하거나 뾰족하거나 향긋하거나 시끄러움을 느끼는 전문화된 활동을 일반적으로 감각(sense)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전문화된 것들에 대한 공통된 활동을 감각 작용이라고 부른다. 특히 우리는 시를 통해 어떤 즐거움이나 행복, 혹은 고통, 분노, 슬픔 등을 느끼고, 이런 느낌이 개별적으로 전문화되어 고유한 특수성을 갖는 일반적 활동을 갖게 된다.
이때의 활동은 감각 작용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감정(emotion)이라고 한다. 느낌에 대한 이러한 구별은 공통된 유(類)에 속하는 두 종(種) 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공통된 감각 속에서 서로의 특질을 갖는 세부 항목으로 보는 것이 맞다.
화자는 “살살 녹여먹자 해놓곤 먼저 으깨버린" ‘알사탕’과 “프리다 칼로의 해바라기"를 통해 감각과 감정을 분석하기 보다는 ‘안개’와 같은 약속과 관계의 불확실성이라는 하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청문회’나 ‘촛불집회’ 등의 사회적 이슈가 “까맣게 잊었던 시어"나 “한달음에 닿을 수 없는 촉촉한 문장"으로 전이, 심화되는 것은 화자의 내적 검증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이 작품 안의 경험에서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님도 간과할 수는 없다.
오현정 시인은 시 안에서 감각적 요소들이 특정한 구조적 패턴에 의해 결합되어 있고, 이 패턴의 감각이 감정에 선행된다는 것을 생래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시인이다. ‘으깨져 버린 사탕’과 초현실주의의 비사실주의 메타포를 내재하고 있는 ‘칼로의 해바라기’는 화자가 지니고 있는 시적 결말에 대한 근거와의 논리적 관계도 아니다. 다만 화자가 이때 지니게 된 감정이 감각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그간의 삶의 직접적 경험에서 비롯된 판별적이고 자율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시인의 감각에 새롭게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댓글 총0건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