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적폐(積弊) 청산으로 불의의 시대를 밀어내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으로 출범한 현 정권이 집권 2년여가 되도록 이어지는 적폐 수사로 오히려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전 정권의 ‘권력형 적폐’부터 최근의 ‘생활 적폐’까지 끝없이 진행되는 적폐 청산 광풍에 국민적 피로감이 임계치에 달했다. 적폐 청산의 최종 목표는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정책·제도·관행을 바로잡는 데 있다. 그런데 지금의 적폐 청산은 미래를 향한 제도 개혁 없이 정치 보복의 ‘인적 청산’으로만 치닫고 있지 않은가?
    
또 적폐 청산에 있어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경구처럼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은 남의 티끌만 한 잘못에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기의 들보 같은 잘못에는 눈감아 버리는 ‘신(新) 적폐’를 양산하고 있지 않은가?
     
내로남불의 과도한 적폐 청산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은 여론조사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능력에 대해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앞지르는 ‘데드크로스(Dead Cross)’가 발생했다.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70%를 넘나들던 지지율이 급격히 허물어지고 있다. 역대 어느 정권도 데드크로스 발생 이후 지지율 곡선의 전체적 흐름을 내리막에서 오르막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정부는 없었다는 점에서 이는 현 정권의 심각한 위기다. 국정 운영의 근본적 변화가 불가피함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현 정권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내세우는 적폐 청산에서 ‘적폐’는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고질화한 우리 사회의 폐단과 문제를 말한다. 적폐를 청산하려면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적폐 청산의 주체는 ‘검찰’이 아니라 입법을 하는 ‘정부’와 ‘국회’가 돼야 한다.
    
그런데 지금 모습은 민생과 경제 등 미래를 향한 시스템 개혁은 전무(全無)한 채 검찰의 칼날만 요란하게 춤추고 있다. 그것도 정의의 여신상처럼 두 눈을 감고, 한 손에 저울을, 다른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 쪽으로 한 눈만 뜬 채, 한 손에는 고장 난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양날의 예리함이 다른 칼을 들고 있다. 촛불 집회 당시 적폐 청산 1호 대상이 ‘검찰’이었는데, 지금 검찰이 적폐 청산의 주체처럼 행세하는 것은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전도(顚倒)된 역설이 아닌가?
   
물론 미래를 향한 시스템 개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환부가 드러나면 수사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는 외과수술처럼 정확하고 신속하게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어야 한다. 여론과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법과 원칙, 팩트와 증거에 따라 공정하고 바른 수사여야 한다. 공정과 정의가 공허한 정치적 수사(修辭)가 되지 않기 위해 권력 실세들의 적폐에도 과감하게 진실 규명의 칼을 들이대는 ‘법불아귀(法不阿貴)’의 성역 없는 수사여야 한다. 처음부터 특정인을 목표로 한 ‘표적 수사’, 악의적 피의 사실 공표를 통한 ‘여론 수사’,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의 중심 세력을 적폐로 모는 ‘정치 수사’는 적폐 청산을 빙자한 정치 보복일 뿐이다.
   
현 정권은 최근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민간인 사찰 의혹에 대해 “현 정부 유전자에는 애초에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등의 오만과 독선으로 일관하고 있다. 천하는 한 개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두 개의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잘 보이고, 하나의 귀로 듣는 것보다 두 개의 귀로 듣는 것이 더 잘 들림에도 끝까지 내 편의 눈과 귀로만 보고 듣고 있다.
   
현 정권은 더는 우리가 피땀 흘려 가꿔온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이제야말로 적폐 청산의 북소리를 멈추고 민생과 경제 등 미래 지향적 시스템 개혁에 나서야 한다. ‘강을 건너 피안에 도착하면 타고 온 배를 버려라(捨筏登岸·사벌등안)’는 『금강경(金剛經)』 경구처럼 ‘내 편’과 ‘표를 위한 공약’을 버리고 통합과 공존의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현 정권은 지금이라도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내로남불의 정치 보복을 멈춰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모두 새로운 대한민국을 함께 이끌어가야 할 동반자임을 깨닫고 분열과 증오의 순간을 뒤로하고 함께 손을 맞잡고 전진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가 피해를 본다’는 신념으로 ‘국민 대통합’을 위해 일로매진(一路邁進)해야 한다. 이 길만이 분열과 증오라는 진정한 적폐를 청산하여 자유 대한민국이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길만이 문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만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까지 포용하여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참고로 이 글은 2018년 12월 24일 중앙일보 시론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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