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 내년에 우리가 주력으로 진행할 교육 콘텐츠 중 팀 활성 프로그램은 김 과장이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세부 개발을 좀 하면 어떨까?“
   
"네? 아... 네!"
      
"그동안 쭉 운영 해온 일이니까 어려울 건 없겠지? 2주 후에 러프한 기획안 가지고 같이 이야기 좀 하자고"
       
김 과장의 얼굴에 살짝 스쳐 지나간 것이 불안이었는지 흥분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분야에 10년이 넘게 일해온 전문가니 이제는 단순한 운영을 넘어 기획부터 주도적으로 해 주기를 바라며 던진 말이었다.
 
일주일이 흘렀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김 과장의 동태를 살폈지만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중간중간 질문이나 의견이 있을 법도 한데 별 다른 일 없이 남은 일주일이 흘렀다.
  
2주가 되는 날, 나는 짐짓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듯 하루를 보냈다. 내 마음속엔 자발적으로 시간에 맞춰 결과물을 가지고 오는지 김 과장의 태도부터 점검해 볼 심산이었다.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일하는 직원이야 말로 리더가 가장 바라는 직원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러나 나의 기대는 무참히 깨어졌고, 퇴근시간이 되어서야 참다못한 이렇게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 과장 오늘 기획안 보기로 한 날 아닌가?“
     
"아! 그거요? 지난주에 제가 계속 외근 중이어서 아직 다 못했어요. 그리고 1년치 기획을 하려니 너무 방대해서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하아....“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사태의 모든 잘못은(아니 잘못의 80% 정도는) 내게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리더의 Empowerment(임파워먼트·권한 이양)는 리더십의 중요한 역량 중 하나인데, 당시 나의 임파워먼트 역량은 거의 바닥을 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임파워먼트의 定義

임파워먼트가 무언인가? HRD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현장의 구성원에게 업무 재량을 위임하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체제 속에서 사람이나 조직의 의욕과 성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권한 부여, 권한 이양이다. 이는 실무자들의 창의적 업무 수행능력을 높이고 스스로 의사결정권을 가지게 함으로써 리더에겐 거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조직의 차원에선 환경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한 것 아닌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리더가 조직의 영속성을 위해 자신만큼(?) 훌륭한 리더를 양성해내기 위한 방법론이  바로 임파워먼트인 것이다.
          
그러니 '어디 시간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보자'라는 나의 꿍꿍이나, 준비하는 과정 중에 질문이나 의견이 없다고 해서 어떠한 중간 점검이나 피드백도 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런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실망하고 포기해서 그 어떤 다른 업무도 지시하지 않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리더가 임파워먼트를 하는 과정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고, 나는 이 3종 세트를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것이 나의 임파워먼트 역량을 바닥 점수라고 자평한 이유이다.
           
누구한테 임파워먼트를 할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그렇다면 리더는 모든 부하직원에게 권한 위임을 해야 하는가?
             
당연하겠지만 아니다. 많은 리더가 고민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권한 위임을 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부하직원이 없다는 것. “과연 믿고 맡겨도 될까"라는 고민이 임파워먼트를 주저하거나 혹은 임파워먼트를 오히려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치부해버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의 역량이나 동기부여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적절히 구분하고 각 상황에 적합한 방법을 통해 순차적으로 임파워먼트를 해 나가야 한다.
      
우선 효율적인 임파워먼트 전략을 위해 역량과 주도성이란 두 가지 축으로 만들어진 매트릭스를 만들어 구성원들을 대입해 각각 어느 분면에 위치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우선 우리가 임파워먼트를 바로 할 수 있는 대상은 역량 수준이 높고 주도성도 높은 그룹이다. 이들에겐 과감하게 권한 위임을 한다. 정확한 목표와 기한의 가이드라인을 주면 스스로 좋은 성과를 내는 그룹이다.
      
확고한 믿음을 전달하고 참견을 최소화한다. 적절한 피드백이 있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그룹이다. 이런 그룹에게 임파워먼트를 한다면 리더는 더 중요하고 거시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이상적인 임파워먼트라고 할 수 있다.
       
역량은 높으나 주도성이 낮은 그룹이라면 확실한 동기부여 필요하다. 왜 이일을 해야 하는지, 팀원으로서의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몰입의 즐거움을 맛보게 할지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 그룹의 구성원들은 자칫 똑똑한데 ‘싸가지’ 없는 직원으로 평가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적절한 동기부여에 의해 일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면 리더에게는 자신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고마운 대상이 된다.
     
역량은 부족하나 주도성 높은 그룹의 구성원은 업무를 통한 역량을 키울 기회를 적극적으로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본적인 태도와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업무 방법에 대해 코칭을 해주면 빠른 결과를 창출해낼 그룹이다.
        
아쉽게도 역량, 주도성 모두 낮은 구성원도 분명 존재한다. 이들에겐 많은 시간과 에너지의 투자가 필요하다. 계획적인 지시와 통제로 세심하게 지도할 필요가 있다. 아직은 권한을 위임해 줄 대상이 아니다. 기초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준다.
     
루벤스의 임파워먼트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역량도 탁월하고 주도성의 수준까지 높은 부하직원과 함께 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미술사에서 이런 사례를 꼽아본다면 17세기 벨기에에서 활동했던 바로크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를 들 수 있겠다.
    
루벤스는 23세에 궁정화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약 3000점의 작품을 남겼다. 3000점이 대단한 이유는 그의 작품은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 대부분 대작(大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고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도록 하거나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과 플랑드르 사이에 평화 협정이 맺어지도록 중재 역할을 하는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미 화가로 유명해진 루벤스였지만 외교관의 역할을 하며 만난 유럽 각국의 왕과 귀족의 주문 때문에 더욱더 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다.
 
 
루벤스의 작품들은 대부분 크기가 매우 크다. 벨기에 왕립미술관의 루벤스의 방.

그래서 루벤스는 자신의 고향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그 일부를 작업장으로 만들어 분업화된 제작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업장(bottega)과 같은 형태의 공방이 만들어진 것이다.
            
루벤스는 그림을 주문받으면 일단 그가 드로잉을 하고 색과 명암을 지정하여 제자와 조수들에게 유화 작업을 시켰다.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마지막으로 루벤스가 손질을 해서 그림을 완성했다.
         
물론 이렇게 작업한 그림은 루벤스라는 이름 대신 '루벤스 공방'의 이름이 붙어 판매되었고, 루벤스가 혼자 완성한 그림과 구별해서 금액을 책정했다. 당연히 루벤스가 모두 그린 그림이 훨씬 비싼 값에 팔렸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분업, 정확하게 지켜지는 작업 시간표 덕분에 그는 전 유럽에서 쇄도하는 주문을 감당할 수 있었고, 루벤스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작품 수는 드로잉을 제외하고도 1600여 점에 달했다. 공방에 도제로 일하기 위해 줄을 선 화가들이 100명을 넘었다고 하니 그의 유명세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루벤스의 제자, 안토니 반 다이크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그 중 루벤스가 최고로 여겼던 제자는 초상화가로 유명한 안토니 반 다이크다. 그는 1599년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10살이 되던 해에 핸드릭 판 발렌이란 화가의 도제가 되어 그림을 배운다. 워낙 출중한 실력 덕분에 16살의 나이에 독립하여 자신만의 작업실을 꾸리고 두 명의 조수를 고용하여 활발한 활동을 한다. 그러다가 당시 플랑드르의 최고 거장 루벤스의 일을 돕게 된다.
            
루벤스의 입장에서 볼 때 반 다이크는 그야말로 역량과 주도성이 모두 특출 난 제자였고 덕분에 루벤스는 가장 중요한 인물의 얼굴 부분을 임파워먼트 할 수 있었다. 루벤스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인체의 표현, 특히 인물의 피부와 역동성에 있는데, 이 중 인물의 얼굴 부분을 반 다이크가 맡아 그렸다는 것은 반 다이크의 재능에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 로벤스는 이러한 권한 이양 덕분에 외교관으로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벤스와 반 다이크의 공동작품 ‘포르센나 앞의 무키우스 스카에볼라’ 1621년 이전, 부다페스트 미술관
 
  
루벤스의 제자로 명성을 쌓아 올린 반 다이크는 외교관이기도 했던 스승 루벤스로부터 배운 매너와 교양으로 로마의 화가들에게 '신사 화가'로 불렸고 종국에는 영국의 왕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크게 출세하며 기사 직위까지 받아 반 다이크 경으로 불리게 됐다. 아름다운 벨기에판 청출어람이다.
     
임파워먼트란 단순하게 리더의 권한을 나누어주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고 조직에서의 경력이 쌓이게 되면서 어느 순간 리더라는 지위를 가지게 된다. 실무자에서 리더로 변모하는 순간 리더의 숙명 중 하나는 임파워먼트를 통해 인재육성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주고 조직에는 영속성을 제공하며 나의 입장에서는 나의 DNA를 조직에 남겨놓는 일, 그것이 바로 임파워먼트의 목적일 것이다.
      
임파워먼트를 통해 부하직원들의 역량을 향상하기로 결심했다면 우선 그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를 어떤 인재로 육성할 것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 그의 경력은 어떤가? 장단점은 무엇인가? 그가 지금까지 어떤 성과를 내왔으며 앞으로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개인적인 삶의 가치와 그를 둘러싼 환경까지도 고려해 그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 줄 수있는 장기적이고 세심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만약 그렇다면 그 관계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관심과 애정은 어떤 곤란함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결국 리더의 고민인 "믿고 맡겨도 될까?"라는 물음은 일단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을 보여주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리더가 되는 일은 근본을 찾아가는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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