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산이 4천400여 개나 있다. 이 가운데 이름깨나 있다는 산은 모두 국립공원, 도립공원,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오서산(790m)은 충청남도에서 손에 꼽히는 산이지만 신기하게도 공원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오서산은 보령, 홍성, 청양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다. 등산로는 산 사면에 실핏줄같이 퍼져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주차 장소가 넓은 홍성군 광천읍에서 올라가는 길을 선택한다.

보령에도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있지만, 광천읍보다 코스가 더 길다. 광천읍은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광천 나들목에서 나가면 닿는다. 광천은 소박한 시골이다. 오서산만 없었다면 방문객이 거의 없는 한적한 마을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읍내 상점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주인에게 오서산에 대해 물으니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그래도 충남에서는 높은 산이에유.”
 

   
 

충남에는 다른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1천m가 넘는 산이 없다. 충남에서 제일 높은 산은 금산에 있는 서대산으로 해발 903.7m이며, 대둔산(878m), 계룡산(845m), 오서산이 뒤를 잇는다. 이 산들이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르기는 쉽지 않다.

유순한 충청도 사람의 기질과 달리 산세는 변덕스럽다.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다가 별안간 가파른 계곡이 나와 등산객을 당황케 하기도 한다.

오서산은 충남 서해안 지역의 산 가운데 가장 높다. 경기도 안성에서 시작해 충남 태안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인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옛날부터 천수만 일대를 항해하는 배들의 등대 구실을 해서 ‘서해의 등대’로 불리기도 한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치는 산으로 인식돼 백제 때는 ‘오산’(烏山), 통일신라 때는 ‘오서악’(烏棲岳)이라고 부르며 성대한 제사를 올렸다. 오서산의 오(烏)는 하늘과 통하는 신성한 까마귀를 나타낸다.

 

   
 

오서산의 능선은 저 멀리 대천해수욕장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고, 그 앞으로는 섬들이 둥실 떠 있다. 오서산 등반은 주로 광천읍 끝자락에 위치한 상담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약 500m 밑에 있는 중담주차장에서 출발하면 조금 더 걸어야 한다. 상담주차장에서 오서산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계절마다 다르다.

가을에는 주차장을 출발해 아차산, 던목고개를 거쳐 정상에 오른 뒤 병풍능선, 공덕고개로 이어지는 길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 산행 시간은 약 5시간으로, 제법 오래 걸리지만 약 3㎞에 달하는 억새밭을 옆에 두고 걸을 수 있다.

오서산 억새밭은 꽤 넓다. 해마다 늦가을이면 산 정상부에 억새가 빼곡히 고개를 내민다. 오서산 억새는 다른 산보다 보는 맛이 깊다. 정상 언덕에 오르면 위로는 억새의 은빛 물결이 펼쳐지고 아래쪽 태안반도 평야에서는 수확을 앞둔 벼들이 금빛 춤을 춘다.
겨울에는 설경(雪景)이 억새를 대신한다. 서해안 지역은 눈이 많이 내려 산에 오를 때 수증기가 얼어붙은 상고대를 볼 수 있다. 겨울 오서산 등반은 종주보다 코스의 절반만 걷는 것을 추천한다.

   
 

정암사 방향으로 올라가 전망대에서 경치를 조망한 뒤 계곡으로 내려가는 코스가 적당하다. 산행 길이는 7㎞ 내외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상담주차장은 산악회 단체 버스도 주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매점이 있지만 겨울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날도 있기 때문에 음료수, 간식 등 준비물은 광천 읍내에서 미리 구입하는 것이 좋다.

본격적인 등반은 마을길을 지나서 시작된다. 산행이 목적이지만 1.5㎞에 달하는 산간 마을길을 거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산 밑에 있어서인지 집집마다 월동 준비를 단단히 했다.

비닐하우스도 겹겹이 비닐을 덧대 바람을 막았다. 굴뚝마다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겨울 정취를 돋운다. 양지바른 담벼락에는 겨우내 먹을 호박순도 걸려 있다. 마을 사람들은 추위를 피해 꼭꼭 숨었는지 인적이 드물다. 이따금 눈싸움을 하는 동네 아이들만 보인다.


   
 

마을을 지나 가파른 포장도로를 올라가니 절이 나왔다. 삼국시대 사찰인 정암사는 최근에 새로 지어져 옛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러나 흰 눈이 내린 산사에선 눈의 무게에 가지가 축 늘어진 소나무와 전각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한다.

정암사에서 정상에 오르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계곡길(1,275m)은 능선길(1,600m)보다 짧지만 경사가 심하다. 반면 능선길은 1천600개의 나무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고민 끝에 쉬워 보이는 능선길을 선택했다. 눈 쌓인 나무 계단을 오르면서 개수를 세어 보기도 했지만 숨이 거칠어지면서 포기했다.

바람이 많은 구간이어서 상고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발밑으로 광천 읍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빼어난 정경이 펼쳐져 지루하지 않다.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고, 마지막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도착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정상이 아니다. 오서산 정상은 능선길로 1㎞를 더 가야 한다. 봄과 가을에는 정상 주변에 꽃이 많아서 오래 머물 만하지만 겨울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기 때문에 오래 있기 힘들다.

원래 전망대가 있던 자리에는 ‘오서정’(烏棲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지난 2010년 9월 서해안을 강타한 태풍에 정자가 부서진 뒤 전망대로 바뀌었다. 전망대에 오르면 오서산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발끝으로 금북정맥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흰 눈을 뚫고 거뭇거뭇 나와 있다. 아스라이 보이는 서해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설악산에서 보았던 동해보다 더 장쾌하다. 왜 오서산이 ‘서해의 등대’인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코스는 가파른 계곡길이다. 이곳은 바람이 불지 않아 나무마다 눈덩이가 알알이 붙어 있다. 하얀 눈은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온갖 시름을 씻어준다. 상고대로 이어진 눈꽃 터널을 지나다 보면 어느새 정암사에 도착한다.■


 

 

 

 

(홍성=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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