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 혹은 콩나물시루 버스를 타고 출근한 사무실에는 산더미 같은 일감만 있을뿐, ’회장 아들이자 유학파인 실장님’과의 로맨스는 없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고, 번듯한 직함을 단채 패셔너블한 차림으로 등장하는(그러면서 연애에 주력하는) 워킹걸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TV 드라마들이 주로 담아온 직장의 달콤한 풍경이 여성 시청자들에게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졌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극적인 재미는 놓치지 않으면서도 직장 현실을 다큐멘터리처럼 예리하게 포착했다는 이유로 요즘 높은 평가를 받는 tvN 드라마 ’미생’은 여성 직장인들의 고단한 하루를 살피는 데도 소홀하지 않다.
’미생’뿐 아니라 자발적 비정규직을 선언한 만능 직장인 ’미스 김’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KBS 2TV ’직장의 신’(2013) 또한 여성 직장인의 애환을 조목조목 잘 짚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인 다역 워킹맘의 현실은 ’죄인’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워킹맘은 어려워. 워킹맘은 늘 죄인이지. 회사에서도 죄인, 어른들에도 죄인, 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
tvN ’미생’의 워킹맘 선 차장(신은정 분)이 읊조리는 말이다.
동기들보다 빨리 승진하고 일과 가사 모두를 소화하면서 사내 슈퍼우먼으로 대접받는 선 차장의 이러한 자조는 1인 다(多)역에 허덕이는 워킹맘의 현실을 보여준다.
선 차장이 어린 딸의 그림에서 얼굴 없는 엄마로 등장하거나 퇴근 후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일 때문에 남편과 다투는 장면 등을 보면서 남 일 같지 않아서 콧등이 시큰했다는 누리꾼들의 반응이 많았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지난 6월 공개한 ’2014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미취학 자녀를 둔 워킹맘 4명 중 3명(74.5%)이 여성 취업이 어려운 첫번째 요인으로 육아 부담을 꼽았다.
사단법인 여성문화네트워크가 2012년 19세 미만 자녀를 둔 워킹맘 1천 명을 조사한 ’워킹맘 고통지수’에서도 83%가 육아와 직장을 함께하는 것이 힘들다고 답했다.
두 드라마는 국가적·사회적으로 장려하는 임신과 출산이 정작 다수의 여성 직장인들에게는 큰 걱정거리로 다가오는 현실도 세밀하게 그려냈다.
KBS 2TV ’직장의 신’에서는 임신 사실이 발각된 계약직 봉희(이미도)가 동료에게 "임신한 거 알려지면 재계약 안 될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말하느냐"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봉희의 모습도, 그런 봉희에게 "회사에 돈이 남아돌아? 뭐가 아쉬워서 임산부를 쓰느냐"고 독설을 퍼붓는 장규직(오지호)의 모습도 낯설지는 않다.
’미생’에도 임신 사실을 주변에 말하지 않고 야근과 새벽 출근을 이어가다 쓰러진 여직원이 등장한다.
그를 두고 자원팀 직원들은 "(여자들은) 기껏 교육해 놓으면 결혼에, 임신에, 남편에 핑계도 많아", "그게 다 여자들이 의리가 없어서 그래"라는 막말에 가까운 인신공격성 발언을 내뱉는다.
◇ 알파걸 수난시대
’미생’은 주인공 장그래(임시완)와는 모든 면에서 대비되는 안영이(강소라)의 예상치 못한 수난사를 통해 ’여자 미생’들의 고충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인턴 시절 독보적인 역량을 자랑했고 에이스들만 모인다는 자원팀에 배치된 알파걸 안영이가 남성중심적 조직에서 겪는 고충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주요한 줄기 중 하나다.
똑똑하고 독립적인, 그러나 남자들이 보기에는 ’잘나고 뻣뻣한’ 안영이는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는 이유로 직속 선배가 던진 보고서에 얼굴을 맞는가 하면 팀원 쓰레기통을 비우고 책상을 청소하라는 지시까지 받기에 이른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과장된 부분도 있겠지만 기존의 트렌디 드라마에서 직장 내 치정극 주인공으로만 등장했던 여성들의 모습보다 현실적인 여성 직장인 상이다.
안영이의 수난사가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윤태호 작가의 웹툰 원작보다 분량도 늘어나고 있다.
’미생’은 직장 내 성희롱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현실도 피해가지 않는다.
"본처가 남의 집에 가서 첩질 하면 이런 기분일 것"이라고 말했다는 정 과장, "파인 옷 입고 온 그 여자가 잘못"이라고 큰소리치는 마 부장, 커피 심부름에 지저분한 언어폭력까지 일삼는 박 과장 등 ’미생’ 속 성희롱 백태는 실로 다양하다.
’직장의 신’도 계약직 미스 김 앞에서 저질 댄스를 추며 희롱하는 장규직 팀장을 통해 성희롱에 둔감한 직장 문화를 꼬집었다.
드라마들은 성희롱을 한 남자직원 상사에게 달려가 "부하 관리 잘하세요"라고 항의하는 ’미생’ 속 선 차장이나 성희롱을 한 상사 다리 사이로 성희롱 신고 안내문을 붙이는 ’직장의 신’ 속 미스김을 통해 시원한 한 방을 먹인다.
’미생’ 제작진은 "여성이 결혼과 출산, 육아 때문에 직업을 포기하거나 성차별을 감내하는 아픔, 직장 내 성희롱 등 묵직한 주제를 담았다"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 미생들을 위로하는 일화로 많은 분이 공감하고 치유되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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