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기자 김충식, 1990년~92년 연재기사 토대로 <남산의 부장들> 출간...韓日 총 52만 부 판매, 논픽션 부문 최대 베스트셀러 기록
●記者란 ‘비교적 투명한 영혼이 불특정 다수의 영혼들과 건조한 문체로 대화하는 사람’
“오래전 ‘남산의 부장들’을 읽고 가장 드라마틱한 중앙정보부가 문을 닫는 순간을 영화에 담았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암살 사건 속 인물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사람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소개하는 팸플릿에 쓰여 있는 우민호(49) 감독의 말이다. 짧은 문장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을 탐구하고 관객과 공유하려는 영화감독으로서의 프로정신이 느껴졌다.
 
흔들린 총성, 그날의 총성...영화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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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포스터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 발생 40일 전부터 시작됐다. 스토리의 중심에는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육군 본부에 몸담았던 주요 인사들의 관계와 심리가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을 중심으로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대통령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등의 갈등을 그린 것이다.
 
실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충성경쟁’을 벌이는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1926-1980)와 경호실장 차지철(1934-1979)의 암투가 핵심이었다.
 
영화에서는 미국에서 박대통령을 독재자라고 외치고 다니는 박용각. 이를 말리려는 김규평. 시시각각 김규평과 대결하는 곽상천. 배후에는 언제나 박 대통령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 속 대사를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짚어본다.
 
“각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김규평(이병헌)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박 대통령(이성민)
“각하는 2인자는 안 살려놔. 태양은 하나니까. 너하고 나하고, 그냥 머슴살이 한 거야. 규평아!"-박용각(곽도원)
“각하가 국가야. 국가 지키는 게 내일이고."-곽상천(이희준)
“세상이 바뀔 것 같아? 이름만 바뀌지."-데보라 심(김소진)
 
영화는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고하는 10·26으로 마무리된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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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황성 옛터’가 구성지게 흘러나오는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가(安家). 양주 시버스 리걸(Chivas Regal)을 단숨에 들이킨 김규평(이병헌)이 작심 발언을 한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 저딴 버러지 새끼랑 정치를 하시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 아닙니까! 각하! 정치 좀 잘 하십쇼!" 
“각하! 이제 그만 하십시오. 하야(下野) 하십시오."
“왜? 목숨 걸고 혁명을 하셨습니까? 100만, 200만 명을 탱크로 밀어서 죽여 버린다고요?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김규평이 속사포처럼 내뱉으며 곽상천에게 총격을 가하고서 박 대통령의 심장을 쏜 것과 동시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경호실 직원들을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서글픈 우리의 현실과 오버랩됐다.
 
대통령 암살 당시 옆에 있었던 심수봉, 당시 상황 생생하게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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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님을 뵙게 된 것은 세 번째였습니다. 나는 대통령 님의 왼쪽 옆에 앉았고, 오른쪽에는 또 한 사람의 여학생이, 모두 여섯 명이었습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표정은 어쩐지 로봇처럼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때 그 사람’을 부른 후의 일이었습니다. 김 부장이 자신의 왼쪽에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과 대통령 님을 연속으로 쏘았습니다. 차 실장은 손에 구멍이 뚫려서 그것을 막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여학생이 대통령께 ‘괜찮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님은 ‘괜찮아’라고 대답한 후 제 쪽으로 기대었습니다. 목 안쪽에서 ‘쿨쿨’하는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필자가 10·26의 상황을 월간조선(2006년 11월)에 썼던 칼럼의 일부다. 필자는 10·26을 앞두고 아사히(朝日)신문이 심수봉 씨와 인터뷰한 기사를 바탕으로 썼다. 이 신문은 당시 심수봉 씨가 故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본 노래 때문이었다’라는 사실도 보도했다.
 
“故박대통령을 처음으로 뵙게 된 것은 1975년이었습니다. 일본의 유명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슬픈 술(酒)’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미소라(美空)씨 노래는 제가 중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레코드를 받아서 익히게 되었습니다. 가사를 열심히 외우고...자연스럽게 일본어 공부도 되었습니다."
 
심수봉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연주를 했다. 그때 나이 19살. 클라리넷 하는 동료의 권유로 한국과 일본의 손님들이 연회(宴會)를 하는 곳에 불려갔다. 한 여성이 일본노래 ‘나가사키(長崎)는 오늘도 비가 왔다’를 불렀다. 그런데, 그 여성의 노래가 박자와 음정이 엉망이어서 화가 난 심수봉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부른 노래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처녀 뱃사공(일본 노래)’이었다.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 연회의 주최자인 남성이 ‘잘 불렀다’고 칭찬을 하면서 20만원을 주었다. 그 당시,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번 돈이 5만원이었으니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을까? 그때 그 남성이 故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인 박종규(1930-1985) 경호실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가 ‘지금부터 각하를 만난다’고 하자 심수봉 씨는 엄청 떨렸단다.
 
“저는 ‘눈물 젖은 두만강’과 ‘황성옛터’를 불렀습니다. 대통령 님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부른 곡이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슬픈 술(酒)’이었습니다. ‘누가 일본 녀석을 데리고 왔어? 너는 일본사람인가?’라고 유쾌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심수봉 씨와 박 대통령의 첫 만남이었다. 일본 노래 때문이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심수봉 씨의 노래는 ‘젊은 사람부터 나이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팬의 폭이 넓다’고 썼다. 심수봉 노래의 특징은 일본의 엔카(演歌), 포―크, 무드가요를 믹스한 것 같은 곡조로서 한국의 ‘트로트’로 분류했다. 또 ‘대부분의 노래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작사·작곡한다. 비음(鼻音)의 감미로운 가성(歌聲)이 특징이다’고 분석했다.
 
원작자 김충식 씨...역사를 외면하는 것은 직무 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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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의 원작자 김충식 씨
“비교적 투명한 영혼이 불특정 다수의 영혼들과 건조한 문체로 대화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기업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현직 기자 시절 P씨가 스스로 내린 ‘기자의 정의’다. 필자는 그의 말에 박수를 보낸다. 기자의 정의에 부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이던 김충식(66, 現가천대 부총장)씨가 동 신문에 1990년부터 2년 2개월 동안 연재됐던 기사가 원조다. 당시 성역이었고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중앙정보부를 취재한 것은 김충식 기자가 아마도 ‘비교적 투명한 영혼’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기사가 2012년 11월 책으로 발간됐다. 개정판과 증보판으로 거듭 태어난 책 <남산의 부장들>은 878쪽에 달하는 방대한 역사적 기록물로 우뚝 섰다.
 
 “중앙정보부가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막대한 권력을 휘두른 당시, 이 조직에 관한 기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자로서 이러한 역사를 외면하는 것은 직무 유기라는 생각에 ‘남산의 부장들’을 연재했습니다."
 
김충식 씨의 말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한·일 양국에서 총 52만 부가 판매돼 논픽션 부문 최대 베스트셀러의 기록을 세운 바 있다. 김충식 씨는 기자 시절 한국 기자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는 어떤 조직인가.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된 정보·수사기관이다. 약칭 중정(中情)으로 통용됐다. 

이 법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 부서의 정보·수사활동을 감독’하며 ‘국가의 타기관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하는 권한을 가졌다.
 
당초 중앙정보부는 김종필 중령의 특무부대 요원 3천 명으로 조직을 결성했으나, 3년 후인 1964년에는 무려 37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방대한 조직을 활용해 대공업무 및 내란죄·외환죄·반란죄·이적죄 등의 범죄수사·정보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반정부 세력에 대한 광범한 감시·통제·적발에 이용됨으로써 독재정권의 폭압장치로도 기능했다.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여론을 정부에 유리하게 조성하는 등 권력의 말초신경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유신 말기인 1979년 10월 26일 권력의 내분으로 현직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제5공화국 출범 직전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한국근대사 사전).
 
한국근대사사전을 빌어서 정리해본 중앙정보부다. <남산의 부장들>의 원작자 김충식 씨에게 기사와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영화에 대해서 물었다. 그의 말이다.

 “200만, 300만 돌파가 문제가 아니라 관객들께서 역사의 성찰 측면에서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태극기를 든 사람들도, 촛불을 든 사람들도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성찰하자는 것입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역사의 백미러(back mirror)’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차를 운전할 때 백미러를 보지 않고서는 질주(疾走)할 수 없습니다. 시대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 시대를 향해서 힘차게 전력 질주하는 백미러로 봐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김충식 씨가 필자에게 한 말은 저서 <남산의 부장들> 서문의 한 대목과 일맥상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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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도 인기 만점인 '남산의 부장들'

<박정희 시대는 중앙정보부가 열었다. 3선 개헌과 유신개헌의 견인차도 정보부였다. 그리고, 10·26 암살로 그 시대를 닫아버린 것도 중앙정보부였다. 중앙정보부가 안보파수꾼·외교주역에서부터 정치공작, 선거조작, 이권배분, 정치자금 징수, 미행, 도청, 고문, 납치, 문학·예술의 사상 평가...올마이트(almighty)의 권력중추였다.>
 
그는 "권력의 중추였던 중앙정보부의 역할에 눈감은 채 박정희 시대를 말하는 것은 허구일 뿐이다. 또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3김 정치, 군벌과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의 본질을 설명할 길도 없다"고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2년 2개월 동안 자신과 싸우면서 <남산의 부장들>을 연재했던 것이다.
 
“세상이 바뀔 것 같아? 이름만 바뀌지."
 
영화에서 가볍게 던지는 여성 로비스트 ‘데보라 심(김소진)’의 대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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