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교태전. 교태전은 왕비의 처소로 왕이 머무는 강녕전과는 담으로 나뉘어 있다. 양의문을 지나야 교태전에 들어갈 수 있다. |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정궁의 이름을 ’시경’(詩經)에서 따 왔다. 나라가 오래도록 ’큰 복’을 받으며 번성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궁은 뒤로는 백악산, 좌우에는 인왕산과 낙산이 버티고 있는 자리에 터를 잡았다. 경복궁은 명칭과 입지 선정에 당대 최고의 사상가가 온갖 정성을 들인 작품이지만, 운명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실 조선의 임금은 경복궁보다는 이궁인 창덕궁에서 주로 생활했다. 절도와 기품이 서린 경복궁보다는 자연 지세를 살려 설계된 창덕궁에서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국이 화마에 휩싸인 임진왜란 때 두 궁궐은 모두 불탔지만, 조선 왕실은 창덕궁만 재건해 사용했다. 반면 경복궁은 약 270년간 폐허로 방치돼 있었다.
’경복궁 중건’이라는 과제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해결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1865년부터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 결과 경복궁은 건물 500여동을 갖춘 장엄한 궁궐로 환생했다. 그러나 일제가 총독부와 야외 전시관을 신축하면서 또다시 대부분이 파괴됐다. 오늘날의 경복궁은 1990년대부터 복원 공사가 진행돼 다소나마 옛 모습을 되찾은 상태다.
◇ 교태전, 포근하고 미려한 중궁전
아담하고 포근한 교태전 경복궁 교태전은 ㅁ자집으로 행각이 모두 연결돼 있다. 강녕전에 비해 여성스러운 느낌을 준다. 교태전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는 점이 특징이다. |
경복궁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은 근정전(勤政殿)이다. 왕이 공식 행사를 치르던 정전으로 조선의 권위와 명예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삼면이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닥에는 촘촘하게 박석을 깔았다.
군주의 공간은 근정전 뒤편의 사정전(思政殿)으로 이어진다. 사정전은 임금이 평상시에 정사를 펼치고 주연을 즐기던 편전이었다.
사정전에서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휴식을 취하고 잠을 청하는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다.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군왕은 이처럼 일직선상에 놓인 정전, 편전, 침전을 오가며 일상을 보냈다.
남녀가 유별하던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도 당연히 나뉘어 있었다. 왕비가 머무는 중궁인 교태전(交泰殿)은 강녕전과 담을 두고 자리했다. 그래서 강녕전에서 또 다른 문인 양의문(兩儀門)을 거쳐야 교태전에 들어갈 수 있다.
여성들의 구역은 교태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교태전은 확실히 여성스럽고 단아한 분위기가 풍긴다. 건물이 독립돼 있는 강녕전과 달리 행각이 ㅁ자집처럼 모두 연결돼 있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푸근하다.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가 아니라 세종 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수차례 소실됐는데, 20세기 이후에도 철거와 재건의 역사가 반복됐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일어나자 교태전을 뜯어내 내전인 대조전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태전은 1995년 완공된 새것이다.
교태전 아미산 굴뚝과 자경전 십장생 굴뚝 경복궁 교태전의 가산인 아미산에 세워진 굴뚝(왼쪽)과 자경전 뒤편에 있는 십장생 굴뚝. 가운데에 그림이 그려져 있어 예술 조형물로 느껴진다. |
전각의 뒤뜰에 있는 가산(假山)인 아미산에는 약 150년 동안 자리를 지킨 굴뚝 4개가 서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인 아미산 굴뚝은 주황색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육각기둥 형태로 만들었다.
굴뚝 벽면에는 장수와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학, 소나무, 매화, 사슴, 해태, 불가사리 같은 그림을 끼워 넣고, 위쪽에는 기와를 얹은 뒤 자그마한 연기 구멍을 냈다.
아미산은 굴뚝뿐만 아니라 창덕궁 낙선재에 비견되는 화계도 볼만하다. 경회루 앞 연못을 파낼 때 생긴 흙으로 조성한 아미산은 비탈진 오르막이 아니라 계단으로 돼 있다. 여기에 다양한 식물을 심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만발한다.
◇ 자경전, 대비를 위해 마련한 별당
대비를 위해 세워진 자경전 교태전에서 소주방을 지나면 자경전이 나온다.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아들을 왕으로 간택해 준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
고종은 궁궐에서 나고 자란 왕자가 아니었다. 족보를 따져보면 왕가의 후손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주상에 오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에는 왕이 대를 이을 적자를 낳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고종의 친부는 혼돈의 틈바구니 속에서 은밀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여 아들을 권좌에 앉혔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에게 옥새를 넘겨준 인물은 헌종의 어머니이자 대비인 신정왕후였다.
대궐 음식을 장만하던 소주방 복원 공사장의 담벼락을 따라가면 자경전(慈慶殿)이 나온다. 자경전은 대원군이 고종을 양자로 삼은 신정왕후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대비는 이곳에서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행했다. 준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사가 발생했지만, 1888년 재건돼 경복궁의 침전 중 유일하게 100년 이상을 버텼다.
왕가의 최고 어른인 대비에게 헌상된 자경전은 교태전보다 구조가 복잡하고 위엄이 느껴진다.
전각을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쪽에 청연루(淸燕樓)라는 누마루와 별채인 협경당(協慶堂)이 붙어 있고, 뒤편에는 온돌이 놓인 복안당(福安堂)이 연결돼 있다. 침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웅크리고 있는 동물상인 서수(瑞獸)가 있다.
자경전에서 눈길이 가는 곳은 따로 있다. 우선 전각 뒤쪽에 있는 십장생 굴뚝이다. 자경전과는 별도로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유산으로, 생김새가 매우 독특하다. 길쭉하고 늘씬한 일반적인 굴뚝과는 다르게 담을 돌출시켜 만들었다. 커다란 캔버스 같은 담에는 대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도가 그려져 있다.
자경전의 아름다운 꽃담 경복궁 자경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글씨가 들어가 있는 꽃담이 있다. 꽃담은 여성을 위한 전각인 자경전과 잘 어울린다. |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꽃담도 인상적이다. 조선의 꽃담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자경전 담에는 다채로운 그림과 글자, 무늬가 표현돼 있다. 은은한 색감과 단정하고 정연한 모양새가 무척 아름답다.
◇ 곤녕합,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적 장소
교태전과 자경전에서 더 안쪽으로 나아가면 전각이 별로 없어 썰렁하다. 원래 빈궁전인 흥복전(興福殿)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교태전과 규모가 비슷했던 흥복전에서는 신정왕후가 승하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흥복전의 부속 건물인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이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다. 후궁과 궁녀들이 거주한 두 건물은 당호가 다르고 담으로 구분돼 있지만, 복도를 통해 왕래할 수 있다.
향기가 퍼지는 정자, 향원정 경복궁 향원정은 건청궁의 앞마당이자 경회루와 대비되는 또 다른 누각이다. 경회루와는 달리 부드러운 곡선이 조경의 핵심이다. |
함화당 구역의 북쪽, 경복궁의 후원에는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뜻의 향원정(香遠亭)이 위치한다. 향원정은 연못과 건물이 네모반듯한 경회루와는 반대로 부드러운 곡선이 조경의 핵심이다. 그래서 분위기가 자못 여성스럽고 아담하다.
향원정의 연못 위에 남향으로 가로놓인 다리는 한국전쟁 이후 가설됐다. 예전에 있던 32m 길이의 구름다리는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나 있었다. ’향기에 취하는 다리’라는 취향교(醉香橋)를 건너면 바로 건청궁(乾淸宮)에 다다랐다. 향원정은 건청궁에 딸려 있는 너른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궁궐 전각 가운데 ’궁’ 자로 끝나는 건물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고종은 궁 안의 작은 궁으로 건청궁을 지었다. 그는 경복궁에 수많은 건물이 새로 들어섰는데도 궁내 한적한 곳에 건청궁을 세웠다.
재정에 부담을 주는 무리한 공사라는 상소가 잇따랐지만, 사비인 내탕금을 털어가며 완공했다. 고종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주도적으로 계획한 전각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건청궁은 효명세자가 순조를 위해 지은 연경당과 헌종이 건설을 명한 낙선재처럼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의 형태를 띤다. 보통의 궁궐 전각과 다르게 단청이 없어 수수하고 소박하다.
내부는 고종이 살던 장안당(長安堂), 명성황후가 기거한 곤녕합(坤寧閤), 상궁이 체류하고 곳간이 있던 복수당(福綏堂)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1885년부터 10년 동안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해로의 꿈은 1895년 일어난 을미사변으로 일순간에 날아갔다. 그해 10월 일제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를 곤녕합에서 무참히 시해했다.
신변의 위협을 절감한 고종은 다음 해 2월 건청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주인이 없어진 건청궁은 1909년 헐렸고, 한 세기가 지난 2007년 복원됐다. 비록 새롭게 완성된 건물이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애잔하고 아린 감정이 솟는다.■
경복궁의 설경. 여성들의 구역은 경복궁 뒤쪽에 있었다. (연합뉴스DB) |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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