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밀회>의 한 장면 |
필자는 며칠 전 ’절친’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판타지라는 곡 아느냐?”며 다그치듯 물어왔다. “평소 노래방만 가면 트로트만 부르면서 난데없이 무슨 클래식?”이라고 반문했다가 “드라마도 안 봐?”라며 조크만 먹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드라마이길래, 학생, 아줌마, 교수까지 수다만 시작하면 슈베르트곡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코웃음을 쳐버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우연히 TV 앞에 앉아서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 한 장면에 눈이 고정되었다. 짜릿하고 강렬했다. 피아노의 선율이 마치 베드신보다 더 야했다면 오버일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면 정직한 내 느낌일 것이다. 다름 아닌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판타지’였다. 극중 김희애와 유아인이 피아노 연주를 했는데, 그 선율이 치명적 사랑을 예고하는 복선처럼 깔리는 듯 했다. 음악이 말보다 더 진한 감동으로 와 닿을 수 있다는 그 실례를 드라마로 강의들은 기분이었다.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판타지 D,940’는 슈베르트가 서른한 살에 요절하기 직전 작곡했고, 당시 자신의 피아노 스승인 백작부인 캐롤린에게 헌정한 곡이다. 슈베르트 곡들이 대부분 서정적 선율로 그윽한 수묵화를 닮았다면, 이곡은 기존 그 어떤 곡과 달리 서정에다가 정열까지 더해져서 치명적 불륜을 예고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사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배우들의 명표정과 사연, 피아노 선율이 절묘하게 얽혀 숨막히는 절정감을 맛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가히 장안에 화제가 될 만했다. 피아노 선율이라면 지겹도록 듣고 사는 나 역시도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필’이 꽂혀서 한참을 넋 놓았으니 말이다. 클래식의 ‘클’자도 모르는 아줌마들 사이에서도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판타지’는 얘기꺼리가 되고 있는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역시 멜로 드라마의 힘은 메가톤급이라고 해야겠다.
필자는 그 힘이 드라마의 힘이 아니라 바로 음악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래 음악은 사람의 삶 속에서 언어가 아닌 선율로, 사랑과 이별과 증오와 환희 등을 멋지게 그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음악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조화 그 자체다. 음악으로 인간은 감동 외에도 정화와 배설의 카타르시스를 기꺼이 경험할 수 있다.
만약 화제의 그 드라마에서 음악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해석이 되었을까? 모르긴 해도 스무 살 연하남과 유부녀가 사랑에 빠지는, 추악하고 부도덕한 치정극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 어떠한 대사와 장면으로도 막장 드라마라는 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치정극인 줄 알면서도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왜일까? 바로 피아노 명연주와 선율이 그 극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었던 걱정과 못마땅함을 정화시키고 배설시켜 버렸다고 본다. 결국 음악이 치정극을 설렘과 사랑의 명장면으로 승화시켜버린 것이다.
이렇듯 음악은 감정을 표현하는 최상의 능력을 가졌다. 말로 글로 형언할 수 없는 우리의 감정을 음악은 대신 말해주고 표현해 준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사랑하는 이도 떠올릴 수 있고, 격정의 선율 속에서 배신감도 삭여낼 수 있기에. 그래서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느끼고 겪는 것’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실제로 음악치료가 그러하다. 음악의 선율이 한 사람의 한과 서글픔을 녹여낼 수 있고, 두려움과 걱정까지 치료할 수 있다. 매일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팍팍한 현실이 한결 부드럽게 느껴지고 자신감까지 생길 수 있다.
웬 구라? 구라, 아니다. 사랑하고 싶은가.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가. 혹시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부터 당장 음악을 들어보라. 음악 안에서 태생적 양심과 선(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고 있을 때,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을 꿈꿀 때 가장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고, 음악이 바로 그 길을 인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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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자는 1967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숙명여대 피아노 페다고지 연구과정 강사로 활동한바 있으며, 현재 한국피아노교수법연구소 연구원과 전임강사와 음악심리 상담사로 공무원, 간호사회 인력 교육 강의등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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