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도동서원, 경상남도 함양 남계서원, 전라남도 장성 필암서원, 전라북도 정읍 무성서원, 충청남도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는 7월 6일(현지시각) '한국의 서원'의 세계유산 목록 등재를 결정했다.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하는 한국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중국 등 여러 위원국이 등재를 지지하고 축하했다.
 
'한국의 서원'은 2011년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이후 2015년 1월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유네스코세계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반려' 의견에 따라 2016년 4월 신청을 자진 철회한 바 있다.
 
이후 비슷한 국내외 유산들과 비교 연구, 연속 유산으로서 서원 9곳의 논리를 강화한 등재신청서를 새로 작성했다. 2018년 1월 유네스코에 새 등재신청서 제출한 후 약 1년 반 동안 자문기구가 심사했고, 올해 5월 ICOMOS가 '등재 권고' 의견을 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유산 14곳을 보유하게 됐다.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1997년 창덕궁과 화성, 2000년 경주 역사유적지구와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2007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2009년 조선왕릉, 2010년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2014년 남한산성, 2015년 백제역사 유적지구, 2018년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 결정과 등재 후 서원 9곳에 대한 통합 보존 관리방안 마련을 권고했다. 문화재청과 외교부는 세계유산 등재 권고사항 이행을 위해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할 예정이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널리 보편화됐던 성리학의 지역적 전파에 이바지한 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인정했다"며 "새롭게 등재된 세계유산 보호에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 지방 정부와 적극 협력해 해당 유산의 통합 보존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전했다.

  
 

 

 

소수서원 다음으로 설립된 경남 함양 남계서원. 이어 경상북도 안동 병산서원과 전북 정읍시 무성서원 전경이다(위부터).

  

그렇다면 '한국의 서원'은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이 세운 사립 성리학 학교다.
 
1543년 건립된 한국 최초 서원인 경상북도 영주의 소수서원을 포함해 경상남도 함양에 1552년 건립된 남계서원, 1573년 경상북도 경주에 세워진 옥산서원, 1574년 안동에 세워진 도산서원, 1590년 전라남도 장성에 세워진 필암서원, 1605년 대구광역시 달성에 세워진 도동서원, 1613년 경북 안동에 세워진 병산서원, 1615년 전라북도 정읍에 세워진 무성서원, 1634년 충청남도 논산에 세워진 돈암서원 등 모두 9곳이다. 신청 순서는 건립연도를 따랐다. 
 
한국의 서원은 성리학 가치에 부합한 이상적 지식인 양성, 지역 대표 성리학자 제향, 지역사회 공론 형성 등 3가지 기능을 수행했다. 성리학자들은 강학을 통해 세계를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이해했고 정기적 제향을 통해 학파 결집을 꾀했다. 서로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부합한 향촌 교화활동을 주도했다.
 
서원은 강학, 제향, 교류, 유식(唯識)의 기능을 위해 각각 강당, 사우(祠宇), 누마루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영역을 구성했다. 이들 각 영역은 지형, 외부공간, 기단, 담장, 대문을 이용해 유기적, 연속적 위계로 결합됐다.
 
소수서원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서원이다. 경북 영주시 죽계천 서쪽에 있는 이 서원은 본래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서원에 사찰 진입로를 알려주는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1542년 8월 주세붕과 주민들이 한국 최초로 성리학을 수용한 안향을 배향한 사우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설립하는 공사를 시작해 1543년 2월 준공했다.
 
소수서원 배치는 정형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원이 갖춰야 할 모든 건축 요소가 있다. 이는 이후 서원에도 필수적 건축 요소로 작용했다. 소수서원은 강당, 사우, 기숙사인 재사의 초기 건축형식을 수립한 사례에 속한다. 온돌, 마루, 퇴칸을 활용한 소수서원 건축 기법은 16세기부터 유행한 한국 전통 건축법으로 좌식 생활습관을 반영했다.
  
제향시설로는 사우 문성공묘와 전사청, 강학시설로는 강당 명륜당, 재사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 도서관 장서각, 교류와 유식 시설로는 정자 경렴정, 취한대, 석각 경자바위가 있다. 소수서원은 계곡을 둘러싼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입지함으로써 자연을 서원 건축 요소로 도입했다. 주세붕은 정자 경렴정 맞은편에 성리학 개념의 하나인 경(敬)을 석각해 자연을 감상하면서도 성리학적 의미를 깨닫도록 했다.
 
소수서원은 교육과 제향 관련 운영 규정을 최초로 세웠다. 교육 규정은 강의 횟수, 평가 방식, 입학 관련 사항들이다. 제향 규정은 제향 횟수, 절차, 참여자 구실 관련 사항들이다. 소수서원에서 제정한 교육 관련 규정들은 이후 건립된 서원들의 교육 규정들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남계서원으로 지역 사림들의 주도로 설립된 최초 사례다. 1552년 학자 강익의 주도하에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려고 함양 사림 30여명이 참여해 서원 건립을 추진했다. 1561년 사우와 강당 명성당(明誠堂)이 완공됐다.
 
함양 출신 사림으로 16세기 전반 중앙 정계에 진출한 정여창은 중앙 관료들의 관료주의적이고 훈구 중심적 성향에 대해 성리학에 기반한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 활동을 했다. 이후 남계서원은 성리학적 실천과 교육 함양을 대표하는 사림이자 남계서원 건립과 초기 운영을 주도한 강익과 정온을 모셨다. 16세기 후반 일본 침입에 맞서 경상남도 의병활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 1595년 일본군에 의해 모두 불에 탔으나 전쟁이 끝난 뒤 1603년 바로 지역 사림들이 서원을 재건했다. 19세기까지 훼철되지 않은 경상남도 유일의 서원이다.
 
전면에 들판이 조성된 탁 트인 경사지에 있는 남계서원은 경사지를 활용해 제향, 강학, 교류 유식이란 서원 배치 정형을 처음 제시해 한국 서원의 독창적 건축 배치의 근간을 마련했다. 주요 건물 제향시설은 사우, 전사청이다. 남계서원은 제향공간의 구성에서 3칸의 신문과 3칸의 사우, 제향 준비를 위한 전사청을 유기적으로 구획해 이후 서원 제향 공간의 전형을 이뤘다.
 
강학시설로는 강당 명성당, 재사 양정재·보인재, 경판각이 있다. 우측 재사 앞에는 제향인물의 기념비가 있다. 교류와 유식 시설로는 애련헌, 영매헌, 누각 풍영루, 연당이 있다. 풍영루는 18세기 건립된 누각으로 이후 건립된 서원에서 보편화된 누각 건축물에 적용됐다. 누각 건립 이전에는 두 재사 바깥쪽에 있는 마루와 그 아래에 연당 두 곳이 유식 기능을 했다. 남계서원은 다른 서원보다 작아도 모든 서원 구성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췄을 뿐만 아니라, 각 건축물 배치형식까지 시원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
 
옥산서원은 출판과 장서 중심기구으로서의 서원 기능을 정립했다. 이 서원에는 제향자의 문집, 성리학 서적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관련 서적들이 출판, 소장되어 있다. 소장된 입학 규정, 교육 평가 내용과 관련된 고문서는 서원 교육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서원에는 원생 선발과 평가에 대한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원생 선발관련 자료에는 천거 유생 명단과 천거자가 기재됐다. 평가 자료인 강지(講紙)는 원생 성적 기록부다. 시험과목에 따라 성적을 4등급으로 구분하고 성적 아래에 채점자 서명이 있다.
 
자계천이 휘돌아가는 경사지에 있는 옥산서원는 앞뒤로 자옥산과 화개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국 성리학 발전 단계에서 존재론, 우주론 등 성리학 이론을 탐구하고 토론을 주도했던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이제민을 비롯한 경주의 사림들이 힘을 합쳐 1572년 건립했다. 2월 공사를 시작해 8월 사우 체인묘(體仁廟), 강당 구인당(求仁堂), 동재 민구재(敏求齋), 서재 암수재(闇修齋), 1573년 누각인 무변루(無邊樓)와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세웠다.
 
제향시설로는 사우 체인묘와 전사청, 강학시설로는 강당 구인당과 재사 민구재, 암수재가 있다. 강당 동쪽 뒤편에는 문집판각과 서적을 보관하는 경각이 있다. 이언적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강당 서쪽 뒷편에 있다. 교류 및 유식시설로는 누각 무변루와 세심천 주변의 세심대가 있다. 옥산서원은 정문인 역락문부터 무변루, 체인문, 체인묘까지 일직선으로 구성돼 상하 축선으로 구성된 서원 건축 특성을 드러낸다.
 
옥산서원은 건축적으로 교류와 유식 시설로서 누마루 건축물을 한국에서 최초로 도입했다. 누마루 무변루는 강학공간과 유식공간을 구분하는 진입문이자 외부와 내부의 경관을 연결한 건축물로 이후 건립된 서원들의 건축 구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무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 위층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며, 그 밖으로 좌우 각 1칸에는 퇴칸처럼 덧붙인 누마루를 만들어 난간을 둘렀다. 무변루는 내부와 외부가 모두 열려있는 구조로 가변적 경관 개폐방식을 통해 주변경관을 시각적으로 서원 안에 끌어들일 수 있다.
 
도산서원은 서원이 학문과 학파 중심 기구로 발전한 한국 서원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서원 건립 주체는 예안과 안동 인근의 사림과 안동 출신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이 한국에서 정착되고 체계화하는데 공헌한 이황의 제자들이다. 한국 서원 중 학문 및 학파의 전형을 이룬 대표 서원으로 한국 서원 역사에서 학술적,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상징적 서원이다. 이황은 1560년 도산서당을 건립하고, 1561년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건립했다. 1570년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림들이 서당 뒤쪽에 서원 건립을 발의했다. 1614년 이황의 제자였던 조목도 종향됐다. 
 
도산서원은 토론 중심의 독특한 강학 활동이 존재했다. 성리학 관련 다양한 철학적 논쟁을 거쳤고, 이를 기반으로 학파의 통일된 의견을 종합했다. '강회록'은 그 과정에 일어난 사항을 기록한 자료로써 성리학 학술 전당으로서 서원 기능을 엿볼 수 있다. 도산서원에는 16~19세기 운영된 강학활동 관련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성리학 관련 고서, 목판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서원 건물이 낙동강과 평야를 바라보게 구성됐다. 이황의 강학처였던 도산서당을 모태로 이황 사후 서원으로 건립됐다. 현재에도 강학공간 전면에 도산서당이 있다. 도산서원은 자연친화적 경관입지를 구현한 한국 서원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성리학적 공간으로서 서원 건축 장식의 간소화를 실현, 독자적으로 완성한 사례다.
 
제향시설로는 사우 상덕사, 전사청, 주청, 강학시설로는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된다. 상단에는 강당 전교당과 재사 박약재, 홍의재, 도서관 동명광실, 서명광실, 장판각이 있다. 하단에는 제향인물 이황의 강학시설이었던 도산서당, 역락서재, 농운정사가 있다. 교류 및 유식공간에는 누각 대신 천연대와 천광운영대가 있다. 이곳에서 외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기타시설로 서원 중심축 좌측에 서원의 지원을 위한 고직사 2동이 있고, 강 건너편에는 18세기 도산서원에서 시행한 과거시험을 기념하는 시사단이 남아있다.
 
전각 형식에 있어서 도산서원은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의 비대칭 설정으로 서원 건축의 혁신을 보여준다. 비대칭적 구성은 거주시설에서 사우를 거주공간 북서쪽에 배치하는 성리학적 예학 건축론의 한국적 재해석이다. 이 비대칭적 설정은 병산서원 등 도산서원 인근 서원 건축 배치에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의 장판각은 장서공간에 누각형식을 도입한 마루의 또다른 사용 방식을 보여준다. 강당 전교당도 한쪽만 온돌방이 있는 비대칭 구성으로 또 다른 강당 건축 방식을 보여줬다.
 
한국 동남부를 중심으로 시작된 서원 운동이 서남부까지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필암서원은 평탄한 지형에 적합한 건축물 배치 방식을 적용해 세워졌다. 일반적으로 서원들이 경사지에 조성된 이유는 각 공간의 위계를 정해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의도였다. 평지에 있는 필암서원에서는 이를 구현할 수가 없어 강당과 동·서재가 사우를 일상적으로 바라보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이에 따라 다른 서원의 강당은 대체로 입구 문루를 향하지만 필암서원의 강당은 입구를 등지고 있다. 산을 등지고 남향해 좌우로 시립한 동·서재를 사이에 두고 북향해 공손히 예를 표하는 강당을 지켜보는 사우는 의례적 중심일 뿐 아니라 서원의 실질적으로 중심에 있게 했다. 이는 이후 건립된 평지형 서원 배치의 전형이 됐다. 
 
제향시설로는 사우 우동사, 전사청, 한장사가, 강학시설로는 강당 청절당과 재사 진덕재, 숭의재가 있다. 도서관인 경장각과 장판각이 있다. 경장각 현판은 정조가 직접 책을 내려주며 작성했다. 교류 및 유식시설로는 확연루가 있다. 평지형 서원이기 때문에 다른 건축물에서는 외부 경관을 감상하기 어렵고, 확연루에서만 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기타시설로 서원의 중심축 동쪽에 서원을 지원하는 고직사가 있다.
 
이 서원은 노비안, 양안 등 기록물을 통해 경제적 운영 방식 정립 단계를 보여준다. 필암서원에는 서원의 경제적 기반과 관련된 토지, 노비를 포함한 경제 운영 전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관련 고문서에는 서원 소유 전답 규모와 소출량, 노비에 대한 정보가 기록됐다. 특히 이 사원에 현존하는 노비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는 한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노비 족보로서 노비 출신, 가족관계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았다.
 
16세기 중반 성리학 이론을 도식화해 성리학 이해의 진전을 가져온 김인후가 이 사원의 제향인물이다. 김인후가 가진 사회적 영향력이 필암서원을 전라남도 사림과 서원을 주도하는 서원으로 자리잡게 한 기반이었다. 사우 우동사 내부에는 제향인물의 사상을 나타내는 벽화들이 시각적으로 제향인물의 가치관 이해에 도움이 된다.
 
구체적 서원 교육 방식 양상을 입증하는 도동서원는 경사지 서원 건축 배치를 탁월하게 구현했다. 건축물별로 여러 단을 조성해 외부 자연경관을 시각적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경사지 서원 조성 기법을 잘 보여준다. 강당 기단부의 예술적 구현, 최소 규모의 예술적 계획, 흙담 등 경관과 성리학 건축미학의 완성을 이뤘다.
 
도동서원은 전면에 강을 바라보아 강당 중정당, 누각 수월루에서 확인되는 강경 입지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사례다. 서원 건축 구성은 경사지를 기반으로 한 서원의 전형으로 건물들 상호간 위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서원 공간이 좌우 대칭을 이뤄 서원 예제건축 전형을 알 수 있다. 강학 공간 진입 문은 작고 낮게 만들어 진입하는 대상이 자세를 낮춰 서원에 들어올 때 자연스럽게 공경을 나타내도록 했다. 강당 기단부는 다른 서원과 달리 거북, 용 조각이 있다. 벽돌에도 다양한 무늬를 넣어 지나치게 정제된 서원 건축을 보완한 장식을 확인할 수 있다. 거북 무늬는 기단 좌우로 있다. 좌측은 위로, 우측은 아래로 향해 출입의 의미를 부여한다. 용 조각은 서원 전면에 있는 강과 관련이 있다. 일종의 비보(裨補)의 의미로 수해가 나지 않도록 기원한다. 서원 벽돌들은 계층적이면서도 벽돌 내에 다양한 무늬들을 새겼다. 사우 내부에는 제향인물의 시와 이를 형상화한 벽화가 있다.
 
도동서원의 주향인물은 김굉필이다. 성리학을 토대로 교육을 통한 후학 양성에 집중한 사림 활동을 한 김굉필은 성리학 이론 중 실천윤리를 강조했다. 이는 도동서원이 실천윤리에 집중하는 학풍으로 정착, 발전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김굉필의 외증손자이자 17세기 한국 남동부 예학연구의 대표 사림 정구는 도동서원 원규를 제정했다. 이 원규는 교육 방식, 재정 운영, 제향 횟수와 절차, 원장 등 구성원 구실과 임기를 규정했다. 이 원규를 통해 소수서원에서부터 제정된 서원 규정들이 이후 어떻게 구체화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제향시설로는 사우, 전사청, 증반소가, 강학시설로는 강당 중정당, 재사 거인재, 거의재, 장판각이 있다. 교류 및 유식시설로는 누각 수월루가 있다. 유식공간에는 창건당시 식재된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가 있고, 제향인물과 관련된 기념비 3동이 분산돼 세워져 있다. 서원 중심축 서쪽에는 서원의 지원을 위한 고직사가 있다.
 
16세기 후반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임진왜란을 수행한 류성룡의 제자, 후손, 안동 사림이 건립한 병산서원은 서원을 교육기관만이 아니라 만인소 등 사림의 공론장으로도 확대된 기능을 보여준다. 한국 최초로 수천명이 연명한 유소를 올린 병산서원은 지역 공론을 형성하고 종합, 산출하는 공론장 기능을 수행했다. '조선왕조실록' 등 자료에 의하면, 1611년, 1666년, 1800년, 1832년, 1863년에 병산서원에서 조정에 보낸 유소(儒疏)들이 제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서원의 공론장 기능은 공론 소통의 문서인 통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통문은 지역 현안과 관련된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고, 전달했다. 병산서원에는 경북, 대구광역시, 경남의 다양한 서원 및 사림들의 공론을 수합하기 위해 작성된 통문들이 남아 있다. 서원은 류성룡의 저작들도 지속적으로 간행했다. 1633년 '서애선생문집' 초판본, 1647년 '징비록'을 간행했다. 이후에도 두 서책은 여러차례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간행됐다.
 
서원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장식을 배제한다. 만대루를 비롯한 건축물들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뤄 인위적 장식을 보완하고 하고 있다. 서원 건축의 단조로움과 자연친화적 서원 입지와 경관 구성, 자연경관이 건축물과 조화롭게 배치된 탁월한 사례에 속한다. 낙동강과 전면 산지의 조화가 만대루라는 누마루를 통해 건축적으로 구현됐다. 7칸으로 구성된 누각인 만대루는 7가지 화면을 다르게 연출해 서원 앞 자연 경관을 하나로 합쳐지는 극적 공간을 연출하는 구조물이 됐다. 만대루는 옥산서원에서부터 처음 도입된 누마루 중 완성도가 높다.
 
제향시설로는 사우 존덕사, 전사청이, 강학시설로는 강당 입교당, 재사 동직재, 정허재, 장판각이 있다. 교류 및 유식시설로 만대루, 광명지가 있다. 서원의 중심축 오른쪽에 서원의 지원을 위한 고직사가 있다. 이외에도 책판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과 제수를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 주소(廚所)가 부속 건물로 남아있다.
 
무성서원은 한국 서원 발전 과정에서 성리학이 지역단위 지식인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확대하는 단계에 속한다. 다른 서원과 달리 자연 경관보다는 서원의 제향인물들이 활동하던 지역 인근 입지가 특징이다. 무성서원의 제향인물은 최치원, 정극인, 송세림, 신잠, 정언충, 김약묵, 김권이다. 이들 모두 정읍의 흥학과 관련된 사회활동을 한 관료와 지역 사림이다 이 사원은 사림들의 흥학당을 기원으로 하며 흥학을 주도한 사림들을 기리는 사우로 발전했다.
 
성리학 사회전파 관련 사림활동 중 대표 사례는 지역 자치규약 향약이다. 무성서원은 인근지역 향약 거점으로 기능하면서 지역민 결집의 중심이었다. 향약과의 관련성은 강학 의례에도 반영돼 향약 의례인 향음주례(鄕飮酒禮)가 포함됐다. 지역 사회 결집 기능은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배에 항거하는 병오창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기념하는 병오창의기념비가 사원 안에 있다. 정기적으로 관련 행사도 열린다. 
 
서원의 사회적 기능 확대는 서원의 입지와 건축 구성에도 영향을 끼쳐 마을에 포함된 건물로 들어섰고 서원 건축물들도 마을을 항해 열린 공간으로 구성돼 서원 영역 전체를 관통한다. 무성서원 주위에는 지역 성리학자들과의 연계성이 있는 누마루와 사우들이 있다. 사액 현판을 비롯해 학규, 제향인물과 관련 사건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제향시설로는 사우 태산사가, 강학시설로는 강당 명륜당과 재사 강수재가 있다. 강수재는 다른 서원과 달리 강당 앞마당 좌우에 있지 않고 별도로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교류 및 유식시설로는 현가루가 있다. 이 외에 서원과 관련된 다수의 기념비가 서원 내외부에 세워져 있다.
 
성리학 실천 이론인 예학을 한국적으로 완성한 거점인 돈암서원은 예제와 결합한 강학 건축물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강당인 응도당은  다양한 의례 행위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한국 전통건축과 예학 이론을 결합해 완성한 건물로 구현한 사례다. 각 건축물의 현판들도 성리학적 예(禮)와 관련된 다양한 의미들로 구성됐다. 목판과 장서 등 대부분 기록물도 예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학은 전쟁으로 피폐한 국가의 질서를 재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중시된 성리학 주제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됐다.
 
이 서원의 제향인물은 17세기 조선의 예학 연구를 선도한 김장생이다. 김장생의 제자들은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특정 학파를 형성했고 이후 중앙정계의 핵심 인물들로 주요 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후 김장생의 제자인 김집은 1659년, 송준길은 1888년, 송시열은 1695년 추가로 배향했다. 돈암서원은 김장생 생전의 강학처인 양성당에서 발전했다. 김장생은 1602년 양성당을 건립하고 강학 활동을 했다. 631년 김장생이 사망한 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사상을 계승하기 위해 1632년 지역 사림들의 발의로 서원 건립이 추진되어 1634년 건립 됐다. 이때 양성당 옆에 사우를, 사우 앞에는 강당을 짓고 '응도(凝道)'라 했다.
 
돈암서원은 예학 실천공간으로서 서원 형식을 크게 혁신했다. 그 대표 사례가 응도당이다. 응도당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전면, 측면 2칸 모두 8자로 동일하게 계획됐다. 이는 현존하는 서원 강당 중 가장 크다. 응도당 상부 목조 공포는 경쾌한 디자인으로 둔중한 응도당의 형태를 보완한다. 응도당 설계는 제향인물인 김장생이 기획했다. 그의 예학 관련 저술인 '가례집람'에 관련 사항이 도면과 함께 서술되어 있다. 예학과 관련된 토론 저술활동은 응도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현재 돈암서원 장판각에 소장된 자료들은 응도당에서 작성됐다.
 
제향시설로는 사우 숭례사와 전사청,  강학시설로 강당 양성당, 응도당, 재사 거경재, 정의재, 정회당, 경회당, 장판각이 있다. 이 중에서 양성당과 정회당은 김장생이 생전에 강학과 성리학 연구를 했던 건물이다. 응도당은 김장생의 예학 이론서에 수록된 것을 김장생의 사후 제자들이 세웠다. 돈암서원이 홍수로 1881년 현재 위치로 이건될  당시 응도당을 이건하지 못해 김장생이 강학처인 양성당을 강당으로 해서 서원의 형태를 구성했다. 이건 사유와 과정을 기록한 돈암서원 이건비(遯巖書院移建碑)를 보면 당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건비는 서원이 이건되고 약 10여년이 지난 1903년 제향인물 송시열의 후손 송병선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서원의 이건 사유, 이건에 따른 사림의 논의과정, 입지 선정의 사유가 구체적으로 수록됐다. 교류와 유식시설로는 산앙루가 있다. 이외에 서원 내외부에 김장생과  돈암서원이 관련된 기념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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