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코 부패를 꿈꿔 본 적이 없습니다.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1999년 당시 정부 고위관리들이 대우 몰락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면제해 주고 귀국 후 대우차를 경영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설득했기 때문에 한국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대우사태에 대한 개인적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야심이 너무 컸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부문에서 과욕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남들이 15년 만에 한 것을 5년 만에 이루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5년 내에 대우사태는 반드시 나 혼자 잘못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외환위기 당시는 금융위기였지, 산업의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과잉부채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대우의 탓으로 떠넘겼습니다."
 
월간조선은 2003년 9월호를 통해 ‘인간 김우중’을 재조명했다. 당시 월간조선은 전문경영인·교수·경제기자·정치인·관료 124명으로부터 한국 자본주의를 만들어 낸 기업인들을 추천받아 10명을 선정했다. 이어 이들의 傳記를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0명의 기업인은 추천빈도 순서로 1위 이병철(李秉喆), 2위 정주영(鄭周永), 3위 유일한(柳一韓), 4위 박태준(朴泰俊), 5위 최종현(崔鍾賢), 6위 구인회(具仁會), 7위 이병철(李健熙), 8위 김우중(金宇中), 9위 신격호(辛格浩), 10위 구자경(具滋暻)이었다. 1999년에 대우그룹이 정리되기 직전에 해외에 나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실패한 기업인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자가 8위에 오른 점이 흥미로웠다. 전문가들은 김우중 회장의 생애를 넓게 들여다보면서 공(功)이 과(過)보다 훨씬 크다고 평가했다.
 
김우중 회장의 다양한 공과(功過)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세계경영'이다. 故人(고인)의 책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의 한 대목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려고 해야 한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해야 한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발걸음에 의해 조금씩 조그씩 전진해 왔다. 그런 사람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려고 하고,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개척자라고 부른다. 젊은이여,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 회장은 세계경영 해외직역 본사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범세계적으로 경영거점을 확보하는 전략을 적극 실행해갔다. 유럽, 미주, 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 경제가 급속도로 블록화되고 있던 당시 시점에서 단순한 교역이나 국지적 해외 생산거점 확보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블록화에 따른 무역 장벽을 돌파할 전략 없이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 대한 해법이었다.
 
세계경영이란 말 그대로 전 세계를 자신의 활동 무대로 삼는 경영활동을 말한다. 세계의 여러 지역(region), 나라(country), 지방(local)들은 부존 자원, 사회간접자본, 인구와 노동력, 소득과 구매력, 산업구조와 기술수준, 노동조건과 복지제도, 각종 규제와 세제, 기업문화와 노동관행 등 기업 활동과 관련되는 여러 조건들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지역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가장 값싸게 구매할 수 있는 장소에서 생산요소들을 구매하고, 가장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에다 공장을 짓고, 세계를 시장으로 제품을 판매하고자 하는 것이 세계 경영의 개념이다. 
 
세계 경영을 추진할 당시 김 회장은 1년의 2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 공격적인 해외투자 결과 1993년 150개에 불과했던 대우의 해외 거점은 불과 5년 뒤인 1998년 말에는 해외법인 396개를 포함, 589개로 늘어났다. 이들 해외거점은 현지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철저한 독립채산제를 적용하는 등 단순한 현지 법인의 개념을 넘어섰다. 특히 당시 굴지의 글로벌 자동차 회사 미국의 GM과 입찰경쟁 끝에 폴란드 최대 자동차 회사 FSO를 인수해 정상화시킨 사례도 있다.
 
김 회장은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나의 관심은 처음부터 세계였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우리 기업들은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는지 모른다"며 "국내 시장은 한정돼 있었지만 세계 시장은 넓디 넓었다. 그 때부터 나는 나의 세계를 국경 없이 넘다들며 대우를 키워 왔다. 대우는 세계에 도전하여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가려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며 해외 지향적인 인재를 우선적으로 채용해 왔다. 그와 같은 정신이 바로 대우의 정신이기 때문이다"고 회고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고인의 말처럼 세계를 누비며 한국을 알린 김우중 회장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영토는 한층 더 넓어질 수 있었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무엇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장 앞서서 개척했던 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경제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귀감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12월 9일 세상을 떠난 김 회장은 1936년 대구 출생이다.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만 30세인 1967년 창립 이후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의 기업을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대우그룹은 1967년 대우실업에서 출발해 30여년 만인 19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에 자산총액이 76조원에 달하는 재계 2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당시 부채 규모가 89조원에 달했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30조원의 국민 세금이 투입됐다.
 
대우그룹은 외환위기와 함께 유동성 위기를 맞은 후 1999년 8월 채권단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작업)에 들어간 뒤 해체됐다. 이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에서 분식회계 혐의를 받아 해외도피 생활을 하고 복역하는 등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보냈다.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 2017년 22일 오후 서울 중구 밀레니엄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DB


이와 관련 김 회장과 대우맨들은 '대우그룹의 해체'에 대해 "대우의 잘못보다는 당시 정책에 실패한 정부의 잘못이 더 크다"고 억울함을 토로해왔다.
 
김 회장은 지난 2014년 전직 대우그룹 임직원들 500여명이 참석한 '대우특별포럼'에서 "방만한 경영을 하고도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쓰러진 것으로 알려진 대우그룹 해체가 사실과 달리 알려져 있다"며 "이제는 시간이 충분히 지났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고 역사가 자신들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길 바란다"고 주장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의 해체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경영실패’가 아니라 김대중 정권에 의해 의도된 해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평생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다. 그것이 미래 세대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며 "우리는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실수가 미래에 다시는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에세이집 ‘가장 먼저, 가장 멀리 해외로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당시 대우는 외환위기에 대한 입장과 철학이 정부와 달랐다고 주장했다. IMF 위기는 금융당국의 단견과 오판으로 외환 운용을 잘못해 국제금융시장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고, 당시 한국경제의 기초 경제여건은 건실했다고 주장했다.
 
외환관리를 잘못한 정부당국자들과 OECD 가입조건 맞추기에 매달린 국정책임자,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말만 쫓아 국익을 무시했던 DJ 정부 당국자들에게 책임이 있었고, 그들의 모든 잘못을 김우중 회장이나 대우그룹에게 전가했다는 주장이다.
 
또 대우는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고용과 가동률을 극대화하고 수출을 통해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이자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이를 불가능하다고 보고 (대우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몇십억 달러의 무역흑자라고 예측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우는 1998년 한해 홀로 14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계속 세계 경영을 추진하며 전 세계에 걸쳐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후 외환위기로 부담이 급격히 늘어 기업어음(CP), 회사채 발행 등을 요구했지만 정부가 제한을 가했고, 대우는 결국 채무가 늘어나는 등 위기로 해체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한구 전 대우경제연구소 사장 또한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출간한 회고록 '대우는 왜?'를 통해 "대우그룹 해체의 책임은 실패한 정책을 입안한 사람이나 그런 잘못된 정책을 집행한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환관리를 잘못한 정부당국자들과 OECD 가입조건 맞추기에 매달린 국정책임자,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말만 쫓아 국익을 무시했던 DJ 정부 당국자들이 김우중 회장이나 대우그룹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려 할 때는 너무 안타까웠다"고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된 소회를 밝혔다.

김 회장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987년 2월 리비아 대우 캠프에서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속내를 꺼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려서부터 남달리 강한 데가 있었던 것 같고 또한 직관력이 남달리 강했어요. 아마 장사 안 하고 검사가 됐더라면 명검사가 됐을지도 몰라요. 난 어려서도 무슨 일을 보면 그냥 예사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간판을 통해 한자를 익혔고,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를 가지고는 산수를 했고, 버스를 타고 가도 앞에 앉은 사람을 살펴보고는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겠구나’하고 직업 성분 등에 대한 추리훈련을 했지요. 이런저런 경험 때문에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아주 정확하다고 자신합니다. 지금까지 사람 볼 때 별로 실수한 적이 없어요. 또 내가 키워 준 사람 중에서 나를 배신하거나 손해를 끼친 사람이 없으니 내 직감이 맞아떨어진 셈이라고 할까요. 나는 또 자존심이 무척 강했습니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학생 때 아무도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도록 처신했지요. 한성실업 시절에도 그랬지요. 장사를 하다 보니까 사분사분하게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사업상 교제할 때도 돈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나는 상대가 승복할 때까지 설득을 했어요. 인정도 많은 편이지요. 가령 인사 문제만 해도 너무 온정주의로 처리한다고 비판도 없지 않았고 더러는 단호하게 인사조치를 하라는 조언도 들었지만 세상 일을 그렇게 매정하게 칼로 무 자르듯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김 회장의 이 같은 自評(자평)은 부실기업을 정상화시킬 때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김 회장은 기계적인 구조조정이나 생산성 향상을 주창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근로자들을 직접 설득하고 회사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대우조선을 재생시키면서 경남 옥포에서 무려 1년8개월 동안 머물며 정상화를 지휘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근로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근로자 집에서 같이 아침 식사를 하며 현황을 설명하고 회사의 미래를 설파했다. 당시는 노사분규가 심하던 시절이어서 노조도 김 회장이 직접 상대했다.
 
그 몇 년 사이에 대우조선은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했고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수익의 상당 부분을 계열사 지원에 사용하면서 나중에 채권단의 워크아웃을 받기도 했지만 대우조선의 영업력과 건조 능력은 여전히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 경영은 김 회장의 어제와 오늘을 규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세계 경영을 위한 김우중의 자산은 해외지향적 사고와 조직, 그리고 부실기업 재건과정에서 획득한 노하우였다. 중심 전략은 고도성장으로 확인된 산업 근대화 모델의 해외이식을 통해 대우 성장의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획득하겠다는 것이었다.
  
세계 경영이 옳았느냐 글렀느냐의 논란은 지금도 여전하다. 세계 경영은 진취적이고 대담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대우그룹 해체를 촉발시킨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기업인들은 김우증의 ‘실패’가 아니라 ‘이상’에 주목하고 있다. 안정적인 현금 흐름,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 보수적인 경영 전략을 토대로 한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이제 다시는 김우중식 실험과 도전을 감행할 기업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우중식 세계 경영은 당대의 삼성그룹마저 벤치마킹을 시도할 정도로 기업의 국제화 마인드를 확산시키는 데 一助(일조)했다는 데는 전혀 이론이 없다.
  
(주)대우 유럽영업본부장, 대우개발 사장, 카자흐스탄 체신청 회장, 쌍용자동차 사장을 거치면서 김우중의 세계 경영에 참여했던 崔桂龍(최계룡)씨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경영은 김 회장의 놀라운 순발력과 사업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세계 경영은 수출기지 현지화와 이머징 마켓에 근대화 모델을 도입하는 두 가지 전략을 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본력이 취약한 수단, 미얀마 등에서는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팔고 달러 대신 솜이나 목재, 원유 등을 받았습니다. 리비아 공사대금도 기름으로 받았지요. 그런데 대금수령 수단인 기름값이 떨어지자 김 회장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벨기에 정유공장을 인수하는 방안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면 김 회장은 ‘도대체 안 되는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김 회장은 또 호텔사업을 해외시장 개척에 적절하게 활용했습니다. 대우개발은 1990년대 초반에 중국, 알제리, 수단, 불가리아 등에 20개가 넘는 많은 호텔을 지었습니다.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오가는 호텔은 현지 경영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해냈고 개발도상국에 서비스 마인드를 고취시키는 데도 일조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1999년 11월 해외로 떠나며 임직원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경영자원의 동원과 배분에 대한 주의 소홀, 용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던 위기관리’를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대우 해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김우중의 소회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으며 정확했다.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지만 정부 관료들의 잘못된 현실인식과 사사건건 불리하게 돌아갔던 시장환경도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이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 정확하게 가치판단을 내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김 회장이 일군 기업들이 아직도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김우중은 그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했고 기업의 성장과 국가의 발전을 동일시하며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장막 뒤에 몸을 가린 채 측근들을 통해 의중을 전달하는 여느 그룹 총수들과 달리 실무자와의 토론이나 현장 확인을 중시했으며 상대가 웬만큼 공부하거나 탐구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속셈 빠른 체하며 야박하게 그의 공과를 따지기 이전에 참으로 원대했던 그의 기상과 뜨거웠던 열정, 검소하고 부지런했던 그의 생활을 모든 기업인들이 현재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사실 김우중이 한국 경제에 남겨 놓은 가장 소중한 자산은 기업가로서 가져야 할 참된 용기와 신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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