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정치적 ‘힘’이 드러나고 있다.
 
10월 29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청와대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을 먼저 만났다. 청와대 외교·안보 책임자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만날 것으로 예상됐었다. 하지만 임 실장을 먼저 찾은 것이다. 이날 면담에는 우리 측에서 권희석 안보전략비서관이, 미국 측에서는 해리 해리스 주한(駐韓)미국대사, 앨리슨 후커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 선임부보좌관, 케빈 킴 비건 대표 선임보좌관이 배석했다. 비건 대표는 30일 정 실장을 만난다.
         
비건 대표의 임 실장 ‘우선 면담’에 대해 청와대 측은 “미국 측의 요청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미국 측이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관계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실력자’가 임종석 비서실장임을 간파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임종석-비건’ 면담 결과에 대해 청와대는 이날 “오늘 면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 그리고 2차 북미회담 진행 사안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갔다"면서 “임 실장은 비건 대표에게 북미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고, 비건 대표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미국 측이 요청한 ‘한국 정부의 지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지난 10월 19일 강원도 철원 일대 DMZ 내 ‘남북공동유해발굴 현장’을 찾았다. 이날 서훈 국정원장, 정경두 국방부 장관, 조명균 통일부 장관 등이 함께했다. 사진=청와대 동영상 캡처
  
   
북한 비핵화와 대북(對北)제재, 남북경협 문제 등을 두고 한국과 미국간 이견이 노출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미국 행정부 고위 관료들이 문재인 정부의 남북경협 등 대북정책 ‘과속(過速)’을 우려한다는 언급까지 나왔다.
 
브루스 클링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미국은 공개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노력을 지지하는듯하지만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대화를 하면 상당수가 그(문재인)의 대북정책에 매우 우려하거나 심지어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건 특별대표가 방한(訪韓)했고 그가 임종석 실장을 먼저 만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을 정리하면 미국도 임종석 실장의 ‘정치적 파워’를 인정하고 있다.
         
    
군 관계자로부터 유해발굴상황을 듣는 임종석 실장. 사진=청와대 동영상 캡처

사진=청와대 동영상 캡처
 
   
공교롭게도 임종석 실장이 지난 17일 강원도 철원 ‘남북공동유해발굴 현장’을 방문할 당시의 동영상이 청와대 공식 홈페이지 첫 번째 화면에 소개돼 있는데, 선글라스를 낀 임종석 실장이 현직 국가정보원장과 국방부 장관, 통일부 장관 등을 ‘데리고’ 다니는듯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야당이 맹공격을 하고 나섰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29일 “비서실장이 왜 국가정보원장과 국방부 장관, 통일부 장관을 부하 다루듯 대동하고 전방을 시찰하며 패권 정치의 폐단을 보이느냐"며 “국민은 또 다른 차지철, 또 다른 최순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으니 자기 정치를 하려면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국방부에 대한 종합 국감에서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비서실장이 정위치에 있지 않고 군 통수권자처럼 시찰한 것이 적절한 것이냐"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유럽순방 귀국 이후에 가도 충분한 시간이 있는데 맥아더 장군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폼도 대통령처럼 했는데 이런 폼을 잡아야 될 이유가 있느냐"고 비판했다.
     
이에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임 실장은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 자격으로 간 것"이라며 “참고로 선글라스는 PX에서 구입한 2만 원짜리"라고 했다.
        
임 실장의 DMZ 시찰을 두고 야권은 “대통령 행세 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역설적으로 임 실장의 ‘힘’을 야권도 인정한 셈이다. 한편 청와대는 야당의 공세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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