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의 의미에 대해 북한은 지난 20일 ‘북핵(北核) 비핵화에 앞서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 위협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김정은式 ‘한반도 비핵화’라면 주한미군철수까지 가능
     
남북이 그동안 세 차례 정상회담을 하면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강조해왔는데 이 말이 결과적으로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주한미군 철수’까지 이어질 수 있는 극히 ‘위험한 용어’임이 입증된 셈이다.
         
“올해 외교분야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전쟁위협을 없애고 남북관계를 새롭게 정립했다"고 주장하는 청와대가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2월 20일 논평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定義)와 관련해 미국은 ‘북한 비핵화’로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며 제대로 된 정의는 “우리의 핵 억제력을 없애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우리는 제재 따위가 무섭거나 아파서가 아니라 그것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에 문제시하는 것"이라며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종식과 부당한 제재해제 등 사실상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이라며 미국을 향해 ‘한반도의 핵위협’을 먼저 없애라고 주장했다.
      
  
사진=2018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김정은, ‘문재인 대통령’ 갖고 놀았다? 판문점선언·평양공동선언에는 ‘北비핵화’ 없어
   
북한 김정은은 세 차례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한반도 비핵화’가 ‘북한 비핵화’라는 입장을 한 번도 밝히지 않았다. 그런 말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한반도 비핵화=북핵 폐기’라는 인식을 갖게 한 쪽은 오히려 청와대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북측 의지를 확인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해왔다. 청와대가 운영하는 ‘2018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한 대목이다. 4·27 판문점선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1년 만에 마주 앉은 남북 정상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판문점선언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 실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한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판문점선언에서 남북 정상은 한반도에 전쟁이 없는 새로운 평화시대를 천명하며 △남북관계의 전면적·획기적 발전 △군사적 긴장완화와 상호 불가침 합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등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다짐했습니다."
 
판문점선언을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설명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북핵폐기’라는 말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이번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주장한 ‘선(先)미국 핵위협 제거’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말이 ‘판문점선언’ 취지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9·19 평양공동선언문에는 이렇게 돼 있다.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① 북측은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기하기로 하였다.
②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③ 남과 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

    
선언문은 ‘6·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미국이 먼저 핵위협을 제거하면 북한 영변 핵시설을 영구적으로 폐기하고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고 남북이 합의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은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했는데 북한이 이번에 밝힌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定義)대로라면, 문 대통령과 김정은은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미국을 향해 대한민국 땅에서 무기를 포함한 미군(美軍) 병력까지 완전히 철수시키는데 적극 협력하고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진=2018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文대통령은 왜 김정은의 ‘한반도 비핵화 의지’ 수차례 강조했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평양정상회담을 마치고 백두산을 들렀다가 20일 귀환한 직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남북정상회담 대(對)국민보고회를 가졌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확고한 비핵화 의지를 거듭거듭 확약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완전한 비핵화를 끝내고 경제발전에 집중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국민 대다수는 “북한이 이제 핵무기를 없애고 대한민국처럼 경제발전에 집중해 정상국가의 길을 걸어가겠구나"하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 와중에 북한에 대한 경계심과 안보의식은 약화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의 길을 걷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평양정상회담을 마치고 백두산을 들렀다가 20일 귀환한 직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남북정상회담 대(對)국민보고회를 가졌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확고한 비핵화 의지를 거듭거듭 확약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사진=청와대
   
 
문 대통령은 대국민보고회에서 이런 말도 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저는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린 대규모 집단체조와 공연에서 15만 평양시민들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사상 최초로 연설을 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한반도를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제 연설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줬습니다.(중약) 무엇보다 3일 동안 김정은 위원장과 여러 차례 만나, 긴 시간 많은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던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남북관계를 크게 진전시키고 두 정상 간의 신뢰구축에도 큰 도움이 된 방문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중략) 북측에서는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표단을 정성을 다해 맞아 주었습니다. 오고 가는 동안 공항과 길가에서 열렬하게 환영해주고 환송해준 평양시민들께 각별한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두산에 오가는 동안 삼지연공항에서 따뜻하게 맞아주고 배웅해 준 지역주민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대국민보고회에서 밝힌 대로 문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긴 시간 동안 허심탄회한 대화’ 그리고 북한 주민의 열렬한 ‘환호·성원·박수’를 통해 크게 ‘감동’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진정성’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
  
이런 감동과 환호 속에서도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판단력과 이성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문 대통령은 김정은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 비핵화’와 같은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까. 아니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라면 북한의 주장대로 미국이 먼저 핵전력을 없애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조선닷컴 22일자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비핵화’ 주장은 국제사회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CVID)’라는 개념과 완전히 다르다. 북한이 연초부터 내밀었던 비핵화 카드엔 결국 미국과 ‘핵군축 회담’을 하겠다는 복안이 담겨 있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로서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국민에게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모호성 전략’ 써온 김정은, 결국 대한민국과 미국이 속은 셈... “2018년은 安保참사의 해"
    
북한은 그동안 비핵화와 관련해 ‘모호성 전략’을 취해 왔다. 아산정책연구원의 최강 부원장과 차두현 객원연구위원이 21일 발표한 ‘2018년 북한 외교 행보’ 이슈브리프에 따르면, 북한은 대외적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비핵화 표현을 통해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가 북한 핵 능력의 해체와 연결되는 것을 회피했다.
      
최강 부원장과 차두현 연구위원은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2018년 한국 외교의 상당 부분은 북한의 ‘진정성’을 설파하는 데 맞추어졌고 이로 인해 한국 자체의 목소리를 부각하는 것은 미흡했다"며 "북한이 모호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비핵화 조치와 관련,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북한 핵능력의 해체’라는 점에 대한 국제 차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도 외교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용섭 국방대 교수도 조선일보를 통해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와 우리가 생각하는 비핵화는 다르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9·19 공동 선언 등을 보면 북한은 비핵화라는 단어를 ‘동결, 폐쇄·봉인, 불능화’ 등 말장난 식으로 조금씩 바꿔 해석해왔다. 지금은 비핵화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된다. ‘검증 가능한 핵 폐기’와 같은 명확한 표현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대성 전 세종연구소 소장은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과의 인터뷰에서 “올해는 ‘안보 참사의 해’였다면"서 “대한민국 건국 이후 비참한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났다"고 토로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는 ‘이제 강도가 침입 안한다고 한다. 무기도 버린다고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강도가 무기를 안 버리면 어떡할거냐’라는 질문엔 답이 없다"면서 “북한이 내건 위장평화 깃발을 문재인 정부는 민족공조 차원에서 두둔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진짜 실체를 몰라서 속았거나, 아니면 남북공조로 위장평화를 만들어보자고 했거나 둘 중 하나다. 개인적으론 후자 쪽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진=VOA홈페이지 캡처
  
  
美 정치권 “한국 정부의 설명 필요"

   
한편 미국의소리(VOA)는 22일 ‘미 상원의원들, 한반도 유일한 위협은 북 핵...합법적인 주한미군, 핵우산 유지될 것’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 상원의원들은 한반도 비핵화에 미국의 핵 위협 제거도 포함된다는 북한의 주장을 일축했다"며 “합법적으로 배치된 주한미군과 불법적인 북핵·미사일은 교환될 수 없으며, 미국의 핵우산은 역내 안보라는 보다 광범위한 목적을 위해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VOA 보도에 따르면, 밥 메넨데즈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민주당 간사는 “위협은 김정은과 그의 핵무기들"이라며 “김정은과 나란히 함께 가는 세계만이 위협"이라고 지적했다. 공화당 중진 수잔 콜린스 상원의원도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개념 정의에 대해 “매우 걱정스럽게 들린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이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권 일각에서는 “비핵화 협상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던 한국 정부의 해명이 필요하다" “한국 정부는 이런 북한과 왜 (관계) 진전을 추진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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