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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적 위기 속에서 방주 역할을 감당했다. 2020년 국가적 위기 속에서 리틀 이승만들이 일어나 21세기 방주의 사명을 감당하길 소망한다.

2020. 딱 떨어지는 숫자의 해는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를 안겨준다. 2020년을 앞두고 많은 나라들이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2020 어젠다를 내세웠다. 그러나 우리를 정작 기다리고 있었던 건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을 자리매김한 코로나였다. 새해에는 뭔가 터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게 전염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온 세계가 급격히 늘어나는 감염자와 사망자 수를 보며 공포에 떨었다. 그 앞에서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재앙이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자연재해, 식량전쟁, 금융위기 등 더 큰 재앙들이 몰려올 것이다." 말인즉슨, 심판의 날이 우리 코앞에 다가왔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전 세계적 재난을 경험한 우리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두려움이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에 대해 뭐라 말씀하실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대비해야 할까? 심판을 앞둔 상황은 우리 세대만 겪는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는 심판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등이 있다. 인간은 멸망을 앞두고 ‘죽음’에 집중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반대셨다. 하나님은 ‘생명’에 집중하셨고, 늘 소망을 주셨다. 하나님은 멸망 앞에서 항상 ‘살 길’을 내셨다.
 
노아에게는 ‘방주’를, 롯에게는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라는 명령을, 라합에게는 ‘붉은 줄’을 허락하셨다. ‘제발 살아라! 나는 네가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은 죽이는 데 있지 않고 살리는 데 있었다. 심판이라는 시간 앞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내고 싶어 하셨다.
  
1910년. 세계지도에 잘 보이지 않는 그저 점에 불과한 한 나라가 멸망했다. 멸망해도 누구 하나 신경 쓸 이유 없는 나라였다. 사라진다 해도 누구 하나 눈치 채지 못할 나라였다. 왕은 외세에 대항할 힘이 없었고, 안으로는 부정부패가 가득했다. 백성들은 무지했고 도처에 악취가 가득했다. 위로부터 살려 볼 노력도 아래로부터 일어나 볼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회생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가운데 하나님은 ‘방주’를 준비하고 계셨다. 조선을 위한 하나님의 방주, 이승만. 50년 뚝딱! 모든 것이 다 휩쓸렸지만, ‘이승만이라는 거대한 방주’는 홀로 버티고 있었다. 나라는 약했지만, 한 개인은 위대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 한성감옥에선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복음 말씀 가르치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라고 고백했고, 나라가 사라졌을 땐 “이 나라가 예수 종교만 받아들이면, 영국보다 위대해질 것"이라 호언장담 했으며, 숱한 절망의 순간들 속에서도 “병든 자라야 의사가 쓸데 있다"라며 소망을 잃지 않았다.
 
한반도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이승만의 방주 속엔 실로 어마어마한 생명이 태동하고 있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이를 실질적으로 구현시켜준 토지개혁. 공산 이리와 승냥이들 틈 사이에서 이룩해 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80% 이상 문맹률을 20%로 퇴치한 교육혁명. 그로 인해 탄생할 수 있었던 지식 강국과 자유 언론. 미국의 지도자들과 맞서기까지 하며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 참혹한 피비린내 나는 6.25전쟁을 끝으로 대한민국에는 근 70년 동안 평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예수 종교로 교화된 성숙한 시민들이 이승만의 방주 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원대로 죽지 않고 살아났다.
   
2020년. 현재의 한국은 어떠한가? 사람들은 지금 한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정치는 불의하며, 경제는 불안하고, 언론은 거짓으로 만연하다. 가정은 해체되어 가고 있고, 교육은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잃어가고 있으며, 세상의 빛이 돼야 할 교회마저 타락하여 거룩함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통일에 대한 염원이 우리 안에서 희미해지고 있다. 북한 땅에서 고통 받는 우리 동포들과 탈북민들의 삶은 그저 머나먼 이야기일 뿐이다. 살릴 생각도, 관심조차도 없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이승만 할아버지, 평생에 걸쳐 살려놓으신 기독교 나라.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지요?"
 
곧바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뭐 하긴! 나 이승만이 한바탕 한 것처럼 또 누가 한바탕해야지!"
두 눈 부릅뜨고, 호통 치는 80대 노인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렇다. 이젠 우리가 한바탕해야할 때가 왔다. 거인 이승만이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이 나라를 지켜냈다. 이젠 우리 차례다.
  
그런데 이승만의 모든 행적을 다 따라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질 않고, 그러기엔 우리의 지혜는 너무 짧은 것 같다. 그렇다면 딱 하나씩만 맡아보는 건 어떠한가? 각 영역에서 리틀 이승만이 한 명씩 일어나 리틀 방주 한 개씩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정의로운 ‘나’ 일인이 정치를, 정직한 ‘나’ 일인이 경제를, 진실을 외치는 ‘나’ 일인이 매스컴을 살려내는 것이다. 또 참된 지혜를 가르치는 ‘나’ 일인이 교육을, 사랑으로 품는 ‘나’ 일인이 가정을, 거룩한 ‘나’ 일인이 교회를 회복시킬 수 있다. 각자의 ‘나’들이 작은 방주를 만들어 한바탕해야 한다. 이 작은 방주들이 모여 대한민국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명 ‘1인 1방주 한바탕 프로젝트’
 
그러나 작은 방주라 할지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맨바닥에 불씨를 피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불씨에 바람이 일면 삽시간에 온 산을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 노아는 100년, 이승만은 50년이 걸렸다. 그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우리에게도 방주 짓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재앙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금방이라도 우리를 덮칠 듯하여도 조급해 하지 말고, 서두르지도 말자. 고난과 역경, 수치와 비난이 찾아올지라도 묵묵히 버텨내자.
 
이승만도 그랬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순간, 나라가 사라진 순간, 동족에게 배신을 당하는 순간, 이방인들에게 미치광이 노인네라고 손가락질 받는 순간. 이 모든 순간에도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훗날 짜릿한 강펀치를 날릴 순간을 더 밝게 빛내준 어둠이었을 뿐이다. 대한민국 승인을 이뤄낸 순간, 공산주의를 물리친 순간, 최강대국 미국이 약소국의 최전방의 지뢰가 되어주고 미국 세금 8억 달러를 원조해 주기로 결정한 순간. 반공포로 석방으로 얼빠진 세계인들을 향해 씨익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진작했었어야 했는데’ 하며 어퍼컷 한 방 날린 순간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작고 왜소한 동양인 노인네 하나가 온 세계에 불을 질러 놨다. 그 불을 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짜릿한 순간을 위해 우리도 어둠의 시간을 반드시 견뎌야 한다.
   
누구에게나 십자가의 고난이 있다. 많은 성경 인물들에게도 이승만에게도 있었다. 같은 문화와 정서,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나는 이승만의 십자가가 더 피부로 와 닿는다. 스데반 집사가 맞은 돌보다 이승만이 맞아야 했던 돌들이 더 쓰라렸고, 민족을 향해 흘렀던 예레미야의 눈물보다 이승만의 눈물이 더 내 마음을 울렸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끈 모세의 수고보다 민주주의, 토지개혁, 교육혁명, 6.25, 한미동맹까지 이 나라를 이끈 이승만의 경영과 리더십에 더 큰 박수를 쳤다. 또 가나안 땅을 앞두고 죽은 모세보다 이방 땅에서 눈을 감아야 했던 이승만 할아버지가 더 안타깝고 너무 죄송했다. 유대 역사 속엔 많은 성경 인물들이 정신적 지주로 버티고 있지만, 우리에겐 국부 이승만이 있다. 나에겐 여러 성경인물들이 주는 영향력만큼이나 이승만 한 명이 주는 영향력이 컸다.
   
이승만의 진실을 알게 된 한국 사람이라면 내가 말한 이 감정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 때문에 나는 어서 진실이 드러나길 바란다. 이승만을 방주로 만드신 하나님의 역사를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다가오는 재앙 앞에 죽음의 공포보다 생명의 소망을 가지길 바란다. 나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위해 또 다른 작은 방주들을 마련하고 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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