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그럼에도 작년 지방선거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2018년 6·13지방선거는 소위 ‘여당판’이었다. 경상도에서 지자체 단체장 중 여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됐다. 2017년 5월 등장한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지 1년된 시점에 치러진 선거였으니 집권당이 승리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보수 텃밭이었던 경상도에서 ‘더불어민주당’ 간판을 달고 시장, 군수가 되기란 사실상 이변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가 있었더 것 같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공작’의 냄새가 난다. 청와대가 지난해 울산시장 선거 전 경찰에 내려보낸 이른바 '김기현 울산시장 비위 첩보' 문건에는 김 전 시장과 함께 울산 지역 야당 국회의원 3~4명의 정치자금법 위반 의혹 내용도 적혀 있었다고 조선일보가 12월 3일자 기사를 통해 보도했다.
 
보도내용을 살펴보자. 지난해 6·13 지방선거 직전 '김기현 수사'를 벌인 울산경찰청 지능범죄수사팀은 야당 국회의원 3~4명을 대상으로 실제 내사를 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청와대가 국회의원 대부분이 자유한국당 소속이었던 울산 지역 전체의 '물갈이'를 시도하려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첩보 문건이 청와대 해명처럼 '단순 비위 이첩' 문건이 아니라 특정 지역 야당 정치인들을 타깃으로 한 것이어서 하명(下命) 수사용이라는 논란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권 출범 직후 시작된 ‘적폐수사’는 최근까지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어왔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적폐의 ‘부당성’을 제기하지 못했다. 일부 문제를 제기했던 이들은 극단적 선택을 했거나 조직에서 폐기처분 당하는 꼴이 됐다. 지금도 ‘적폐’는 집권세력의 단골 메뉴다.
 
검찰 등에 따르면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2017년 11월 경찰청에 하달한 '김기현 첩보' 문건에는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2010~2012년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의원이던 김기현 전 시장과 중진급 의원 등 4~5명에게 조직적으로 정치자금을 모아 전달했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이 중 김 전 시장을 제외한 3~4명은 현재 한국당·무소속 의원이다.
  
울산경찰청 지능범죄수사팀은 문건을 토대로 지난해 4월쯤 내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수사팀이 지난해 3월 울산시청 등을 압수 수색하면서 김 전 시장 주변 인사들에 대한 본격 수사에 착수한 직후였다. 울산시장 선거를 두 달 앞두고 김 전 시장뿐만 아니라 울산 지역 국회의원(6명) 중 절반 이상의 자유한국당·무소속 의원을 겨냥한 내사를 동시에 벌였다. 이런 내사 관련 기사는 작년 4~5월 울산경찰청발(發)로 쏟아졌다. 하지만 경찰은 울산시장 선거 후 이 사건을 내사 종결(무혐의) 처분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울산뿐이 아니었다. 조선일보가 예리하게 이 부분을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청와대가 작년 6·13 지방선거 전에 '김기현 울산시장 비위 첩보' 문건을 경찰에 내려보내 김 전 시장을 수사하게 했다는 '하명(下命) 수사' 의혹이 점점 커지고 있다"면서 “이와 관련해 작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울산경찰청장과 경남경찰청장이 조기 교체된 사실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2017년 12월 경남경찰청장이 바뀌었다. 지방경찰청장 임기는 1년. 하지만 부임 5개월밖에 안 된 원경환 청장이 물러나고 이용표 신임청장이 부임했다. 석 달 뒤, 경남경찰청이 자유한국당 소속 나동연 당시 양산시장의 시장실과 비서실, 행정계 3곳을 압수 수색했다. 혐의는 '업무추진비 유용'이었다. "나 시장이 신용카드를 허위로 긁어 현금화하는 '카드깡 수법'으로 업무추진비를 유용한 의혹이 있다"고 더불어민주당 소속 예비 후보가 고발하자 곧바로 수사에 나선 것이다. 그러니까 집권당 지방선거 출마 후보가 문제제기를 하니까 경찰이 즉각 반응을 보인 셈이다. 문재인 정부의 ‘경찰’은 검찰과의 수사권 조정 문제로 인해 현 정부에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다.
  
조선일보 보도를 더 보자. 지역 언론에는 '나동연 카드깡' 등 시장을 비판하는 제목의 기사가 쏟아졌다. 민주당 후보는 TV 토론에서 이를 집중 공격했고, 결국 선거에서 이겼다. 그 민주당 후보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캠프 경남선거대책본부 조직특보였던 김일권 현 시장이다.
  
이번에는 창원시장 선거를 보자. 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던 조진래 전 경남부지사는 선거를 2개월여 남긴 시점에 경찰 소환 통보를 받았다. 이후 선거에서 조 전 부지사는 떨어졌고, 노무현 정부 때 민원제도비서관을 지낸 허성무 현 창원시장이 당선됐다. 계속 수사를 받아왔던 조 전 부지사는 올해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천에서는 무소속이었던 송도근 당시 사천시장이 2017년 12월 한국당에 입당한 지 1개월 만에 수뢰 혐의 등으로 수사를 받았다. 그는 당선됐지만, 선거 직전 경찰이 그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기각당하는 등 이 문제로 시달렸다.
 
위 사례들은 경남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2017년 7월 울산경찰청장으로 승진발령난 황운하 현 대전경찰청장 사례도 좀 이상하다. 전임자가 부임한 지 8개월밖에 안 됐는데 그가 새로 부임한 것이다.
 
당시 황운하 울산청장은 부임 직후 김기현 당시 울산시장 수사팀원들을 내보내고 그 자리에 자기와 친한 경찰들을 앉혔다. 그해 12월 청와대에서 하달한 '김기현 첩보 문건'을 받은 울산경찰청은 이를 근거로 시장 선거를 3개월 앞둔 작년 3월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를 받던 김기현 시장은 낙선했고, 문재인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민주당 송철호 시장이 당선됐다.
 
이 무렵 울산경찰청은 울산에 지역구를 둔 자유한국당·무소속 의원 3~4명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도 내사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이 내용 역시 '김기현 첩보 문건'에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경찰이 사실상 선거 개입을 위한 '하명 수사'를 벌였다고 검찰은 의심한다"고 보도했다.
 
법조계와 정치권 인사들은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정권과 경찰이 울산·경남 지역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총력전을 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걸까.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다. 역대 선거에서 PK는 승패를 좌우하는 요충지였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2016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123석)이 여당이었던 새누리당(122석)을 꺾고 1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PK 의석수 확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보수세가 강한 PK에서 새누리당이 27석에 그친 반면, 야권이 13석(민주당 8, 무소속 4, 정의당 1)을 차지했다.
    
탄핵 정국으로 치러진 2017년 조기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낙승할 수 있었던 것도 PK 득표율이 기반이 됐다. 민주당 관계자는 "대선 때마다 여권에서 '영남 후보 필승론'이 나오는 것도 PK의 득표율이 대선 승리에 필수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치러진 선거에서 확실한 PK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며 “'노무현의 유훈(遺訓)'과 같았던 PK 공략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전국 단위 선거인 2018년 지방선거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셈"이라고 전했다.
 
이런 의혹과 관련 없이 민주당은 작년 지방선거에서 부·울·경 광역단체장을 모두 석권했다. 야권은 "그 과정에서 야당 소속 자치단체장 및 후보 수사 같은 무리수가 동원됐고, 이번에 청와대 개입 의혹까지 드러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물론 경찰은 "한국당이 이미 해당 사안과 관련해 작년 4월 직권남용·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지만, 11월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게 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재직하던 2005년, 민정수석실 하명(下命)으로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해 사찰(査察)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2006년 6월 치러진 지방선거를 1년도 남겨두지 않은 시기에 행정부 감찰 대상이 아닌 선출직 공직자의 비위 의혹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백원우 별동대'의 선거 개입과 판박이"라고 주장했다.
 
정유섭 한국당 의원이 입수한 '하명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국무조정실 조사심의관실은 2005년 7월 당시 한나라당 소속 강희복 아산시장이 격려금·전별금 명목의 '떡값' 450만원을 검찰과 경찰에 전달했다는 비위 의혹을 조사했다. 국무조정실은 보고서에서 "대통령비서실에서 하명한 바 있는 전별금 수수 사실에 대한 경찰청장의 조사가 미진하므로 재조사했다"고 썼다. 당시 경찰은 강 시장 측이 해당 금액을 검경에 '떡값'으로 주지 않고 직원들 회식비로 썼다고 판단하고 '무혐의' 결론을 냈다. 그러나 국무조정실은 아산시 관계자와 음식점·주점 관계자 등을 조사해 영수증 등이 허위로 작성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과정에서 정상적 사법 절차를 무시하고 '민간인 사찰'까지 했다는 것이 야당 지적이다. 국무조정실 감찰관들은 갈비집과 술집 업주와 종업원 등 민간인 6명을 '취조'한 뒤 지문 날인된 '자필 진술서'를 받았다. 조선일보는 정유섭 의원의 말을 인용해 "민간인들에 대해선 검경이 형사소송법에 따라 적법한 조사를 해야 맞았다"고 보도했다. 감찰관이 아산시 관계자를 취조하며 "그(구속) 결정은 우리 사정비서관님께서 하신다"고 말한 것도 녹취록을 통해 확인됐다. 당시 사정비서관은 신현수 전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으로, 민정수석이던 문 대통령 지휘를 받고 있었다. 신 전 실장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 법률지원단장이었다. 당시 강 시장의 '떡값' 의혹은 검찰 자체 감찰에서 일부분 사실로 나타났지만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그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재선했지만, 2012년 '저축은행 뇌물 사태'에 연루돼 구속,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청와대의 선거개입 의혹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은 현재까지 직접 해명하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이 12월 2일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고 "민생보다 정쟁을 앞세우고 국민보다 당리당략을 우선시하는 잘못된 정치가 정상 정치를 도태시켰다"고 말했다. 민주당 등 범여권의 선거제도 강제 변경 추진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로 대응하는 한국당을 강하게 비난하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언급하며 "신남방 정책이 본궤도에 안착했다"고 자랑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지금 국민이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얘기는 이런 게 아니다"며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과 유재수 전 부산 경제부시장에 대한 권력 비호 때문에 국민의 의혹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내 '백원우 별동대'에서 활동하며 울산시장 선거 첩보를 수집했다는 의혹을 받는 검찰수사관이 바로 하루 전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사람이 잘못한 일이 없으면 왜 극단적 선택을 했겠나. 이 모든 일이 문 대통령과 연결돼 있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유재수씨는 문 대통령을 '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두 사건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가 사건의 핵심"이라며 “직접 관여했으면 실정법 위반이다. 실정법을 위반한 대통령에게 어떤 벌이 부여되는지는 국민 모두가 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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