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시절 진주농고 교장으로 20년간 재직한 이마무라 다다오(今村忠夫, 1887-1963)씨. 그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代)에 걸쳐 진주농고 발전을 위해 후원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시절 진주농고 교장이었던 이마무라 다다오(今村忠夫, 1887-1963)씨의 한국 사랑을 소개한다. 그는 일본 고치(高知)현 도사시(土佐市) 출신이다. 고향에서 중·고교를 마치고, 멀리 홋카이도대학 농학부를 졸업했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 발령받은 그는 1925년 5월 8일 진주농립공업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학)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의 근무기간은 길었다. 해방을 맞은 1945년 8월 15일까지 재임했다. 묵묵히 교육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가 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실천궁행(實踐躬行·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밟고 몸소 행한다)의 교풍을 진작시켰으며 진주농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내 목이 떨어져도 조선은 독립하지 못한다."
 
이마무라(今村) 교장과 달리 조선 학생들을 무시하고 망언을 한 일본인 교사(2학년 담임)가 있었다. 이마무라 교장이 부임한 2년째인 1927년의 일이다.
 
“우리 모두 동맹 휴학을 하자!"
 
진주농고 2학년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했고, 당시 일본 경찰은 주동학생들의 퇴학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마무라 교장의 결정은 달랐다.
 
“퇴학은 무리입니다. 정학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는 학생들의 편에 서서 일본 경찰을 설득했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인을 향한 보복행위가 많았으나, 이마무라 교장은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퇴직금 기부받은 학교, 금촌(今村)장학회 설립

   
이뿐만이 아니다. 이마무라 교장은 퇴직금 전액을 자신이 20년 몸담았던 학교의 도서 구입비로 기부했다. 퇴직금을 기부 받은 학교는 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장학회를 만들었다. 이마무라(今村) 교장의 이름을 딴 ‘금촌(今村)장학회’가 탄생했던 것이다.
 
해방 후 학교 안에 있던 이마무라의 송덕비도 일제잔재 청산차원에서 없어졌다. 그러나 그의 송덕비는 철거된 지 43년 만에 일본에 다시 세워졌다. 1988년의 일이다. 진주농고의 옛 제자들이 기금을 모아서 이마무라 선생의 생가가 있던 일본 고치현 도사시에 ‘은사의 송덕비’를 재건했던 것이다. 비명은 옛 제자인 은초 정명수 씨가, 비문은 설창수 씨가 썼다.
 
“반세기의 시간을 넘어 일본과 한국이 맺은 사제 간의 사랑이다."
 
당시 일본의 언론들은 ‘일본과 한국이 맺은 ‘사제의 사랑’이라는 내용으로 송덕비의 의미를 보도했다.
 
경남 과학기술대학교 홍보담당 윤성민(45)씨의 말이다.
 
“저도 지난 해 여름 김남경 총장님을 따라 일본의 이마무라 선생의 묘지와 현창비에 가서 참배를 했습니다. 총장님께서는 ‘친일파가 아니라, 지일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1대부터 6대까지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근무했습니다. 그 중에서 6대의 이마무라 교장께서는 진주농고 학생들의 항일(抗日)이 3·1 운동에 이어서 두 번째의 독립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떠난 참 교육자로서 조선의 학생들을 보살피셨던 것입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매 전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마무라 다다오 교장의 손자 이마무라 마사키 (今村昌幹·68) 박사의 말이다.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갚는 것보다 이 은혜가 지속적으로 유지돼서 한일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발전되길 바랍니다."
 
그의 아들 이마무라 쇼코(今村昌耕, 1917-2017)에 이어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代)에 걸쳐서 학교(진주 농고)의 발전을 위해 후원하고 있는 이마무라(今村) 가문의 한국사랑은 이렇게 진한 울림이 되고 있다.
 
‘민족과 국경을 초월한 교육자’ 이마무라 다다오(今村忠夫) 선생의 칭호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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