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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유한자인 인간은 하나하나가 모두 우주다. 인간은 우주와 동일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가동되는 신체기관을 운용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을 상대화하거나 인간과 우주를 구별하는 것은 근대 주체철학의 매우 제한적 시각일 뿐이다. 사진=김재홍 |
수백만 년 호모 사피엔스의 간단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제나 당대를 모순과 불완전으로 인식해 왔다. 영원과 무한을 향한 끊을 수 없는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순과 불완전은 솔직한 자기 토로에 가깝다. 해와 달과 별과 하늘과 우주와 크고 넓고 깊고 놀라운 모든 알 수 없는 것들은 수시로 영원과 무한의 상징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영원의 상징은 사실 유한(有限)의 표상이다. 그것은 유한자의 갈망일 뿐이다.
인간의 역사는 영원을 향한 상징의 역사 혹은 상상의 역사라 할 만하다. 여기에 시적 언어의 가치가 있으며, 시는 불완전한 유한자와 함께 울고 웃으며 기쁨을 나누고 고통을 달래며 이어져 온 예술이다. 인간은 시와 함께 자신의 유한성과 무능을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이가 노래(시)의 연원을 찾는다면 그것은 인간 존재의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래는 처음부터 인간 가까이 있었던 몇 안 되는 자산 중의 하나였다. 노래가 인간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어 노래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직 유한자인 인간은 하나하나가 모두 우주다. 인간은 우주와 동일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가동되는 신체기관을 운용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을 상대화하거나 인간과 우주를 구별하는 것은 근대 주체철학의 매우 제한적 시각일 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우주 속에서 우주와 하나였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우주를 지향하며 우주적 발상과 관점에서 사유하고 표현해 왔다. 인간에게 우주는 별개의 차원도 아니며 타자도 아니며 신앙도 아니다.
“처음으로 한껏 되돌아가면 사람을 구성하는 마지막 소재는 우주의 구성 물질과 일치하게 될 것"이라는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의 언급은 어떤 비유나 종교적 신념이 아니다(『인간 현상(Le Phenomene Humain)』). ‘사람은 사람 이전에 이 땅에 나타난 모든 존재들의 바람과 애씀의 열매’라는 양명수의 통찰도 범신론이나 신비주의라기보다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언어적 인간이 시를 통해 누려 왔던 위안의 효과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우주 생명의 길, 사람됨의 길」, 『인간 현상(Le Phenomene Humain)』).
흰둥개가 앞서 가고 누렁이가 따라가는(白犬前行黃犬隨)
들밭 풀 가에는 무덤들이 늘어섰네.(野田草際塚壘累)
제사 마친 할아버지는 밭두둑 길에서(老翁祭罷田間道)
저물녘에 손주의 부축 받고 취해서 돌아온다.(日暮醉歸扶小兒)
- 이달(1539-1612), 「무덤에 제사 지내는 노래」(祭塚謠) 전문
시인 이달의 생몰년도는 그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격은 세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53세 노년의 이달은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제사 마친 할아버지’가 시인 본인이냐 아니냐와 별개로 전쟁은 대개 한날한시의 제사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수많은 죽음이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 마친 할아버지’가 아들이 아니라 손주의 부축을 받고 돌아오는 장면은 전쟁의 고통을 날카롭게 표현한다.
정민 교수의 질문과 같이 왜 무덤은 ‘산 위’도 아니고, ‘밭두둑 길’에 있으며, “할아버지는 왜 술에 취했을까? 저물녘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무덤 옆을 떠나지 못했던 걸까?"(『한시 이야기』) 자식이 아니라 자식의 아들인 손주를 데리고 자식의 제사를 지내는 아비의 심정이 비통하다. 할아버지를 부축하는 손주의 마음도 애탄하다. 그런 주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곁을 지키는 견공(犬公)들도 슬프리라.
「무덤에 제사 지내는 노래」(祭塚謠)는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 슬픔을 견디는 마음들이 이어져 온 인간의 역사를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다. ‘제사 마친 할아버지’는 분명 죽은 자식이 하늘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을 기원했을 터다. 이승에서의 단명이 저승에서의 행복한 생으로 반전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아가 만일 할아버지에게 어떤 통각의 순간이 있었다면 죽은 자식의 죽음 자체를 우주적 관점에서 극복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슬픔을 슬퍼하면서도 어떤 깊은 안도감을 느꼈었을 수도 있으리라.
내가 세 살 때 전생에 죽어 나가 죽으니 우리 엄마가 나를 땅에 묻잖어, 우리 엄마 불쌍해서 까마귀도 따라와 같이 울었어, 나는 까마귀 등에 업혀 날아갔어
- 중략 -
불쌍한 우리 엄마 젖줄을 놓고 와서 나는 저승에 할아버지 용왕님께 애원했어, 그 후 나는 우리 엄마가 불쌍해서 매일 엄마 집 근처에서 까마귀와 함께 날아와 울었어, 엄마만 나를 알아보았어
- 김종철(1947-2014), 「신굿하는 날 - 오이도4」 중에서
살아남은 아버지가 죽은 자식의 제사를 지내는 앞의 시와 달리 이 작품은 죽은 자식이 살아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한 편은 산 사람의 고통을, 다른 한 편은 죽은 자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고통과 아픔은 동질적이다. 죽은 아들의 영혼은 ‘까마귀 등에 업혀’ 날아갔으나, 돌아와 ‘까마귀’와 함께 불쌍한 어머니를 위해 운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정조에 가 닿는다.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처음으로 한껏 되돌아가면’ 과연 거기에는 우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고 내게 포함된 이 주름진 우주를 표현하는 모든 현실화가 내 시적 가능성의 실현과 동일하다면, 그것은 확실히 설렐 것이다. 또한 나의 물리적 신체적 가능성의 모든 실재화가 시로 현현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확실히 긴장되는 우발적 언어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원과 무한의 상징을 필요로 하는 모든 유한자의 간절하고 영원한 포효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