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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의 사전적 정의는 ‘공개적으로, 또 시간 순(順)으로 거래 기록을 공유하는 분산 디지털 장부(distributed digital ledger for shared transactions chronologically and publicly)’다. 사진=삼성전자 뉴스룸 |
가상공간, 곧 인터넷에서 통용되는 돈인 가상 화폐는 2008년 10월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온라인에 공개한 '비트코인: 피투피(P2P : peer-to-peer) 전자화폐 시스템'이라는 논문에서 태동했다. P2P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피어(참여자)끼리, 곧 개인과 개인 사이에 직접적으로 거래하는 방식을 뜻한다.
P2P 네트워크에서 사용되는 전자화폐가 비트코인이다. 2009년 1월 나카모토가 처음 만들어낸 비트코인은 누구나 발행하고 사용할 수 있는, 암호화된 가상 화폐다. 정부가 발권하고 금융기관이 관리하는 화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비트코인은 역사상 최초로 분산화(decentralized)된 돈인 셈이다.
나카모토는 이런 분산화폐를 만든 이유로 공공기관의 정보 독점 체제를 꼽았다. 개인의 정보는 샅샅이 정부·은행·기업에 노출되지만 이런 기관의 내부 정보는 철저히 은닉된다. 하버드대 사회학자 소사나 주보프가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라고 명명한 기존 체제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금융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누구나 서로 직접 거래하면서 접근성과 투명성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화폐 제도가 등장한 것이다.
나카모토는 가상 화폐의 거래 정보를 저장·관리·검증하는 기술로 블록체인을 창안했다. 블록(덩어리)은 가상 화폐 거래 내용의 묶음, 체인(사슬)은 블록을 차례차례 연결하는 것을 뜻한다. '블록을 서로서로 잇따라 연결한 모음'을 의미하는 블록체인은 일종의 거래 장부다. 거래 내용을 중앙컴퓨터에 저장하는 금융기관과 달리 블록체인에서는 인터넷에 연결된 모든 거래 참여자(피어)의 컴퓨터에 거래 기록의 사본이 각각 저장되므로 참여자는 누구나 거래를 확인할 수 있다. 거래 장부를 분산해서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블록체인은 '분산거래장부'라고 불린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2015년 10월 31일자에서 블록체인을 '신뢰기계(trust machine)'라고 명명했다. 블록체인 기술이 기계가 사람 대신 사회적 신뢰에 기반한 거래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뢰기계로서 블록체인 기술의 가능성은 '블록체인 혁명'(을유문화사), '블록체인노믹스'(한국경제신문), '블록체인 거번먼트'(알마)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트코인은 가장 우수한 가상 화폐이지만 한계도 있다. 우선 1초당 처리되는 거래량이 미미하다. 다수의 분산장부(블록체인) 기록자들이 시시각각 이뤄지는 거래 내용을 암호화해 장부에 저장하면 장부 관리의 대가로 새 비트코인을 받게 되는 이른바 '채굴' 과정에 전력이 과도하게 소모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는 비트코인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차세대 가상 화폐인 트레이드코인(Tradecoin)을 개발 중이다. 트레이드코인은 첨단 암호 기술로 만들어져 국제 거래를 비트코인보다 훨씬 쉽고 안전하며 적은 비용으로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소규모 국가, 기업, 심지어 농부들이 연합해 트레이드코인을 사용하면 국가 화폐 제도와 맞먹는 효율성과 신뢰도가 담보될 것으로 여겨진다. 비트코인과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설계된 트레이드코인이 출현하면 기존 금융질서가 붕괴될 전망이다.
블록체인 기술로 기존 화폐제도가 도전을 받게 되면서 돈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 저술가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돈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김영사)에 주목할 만하다.
이번 가상 화폐 광풍은 돈이 단순한 경제 수단이기보다는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는 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출처=조선일보 2018년 2월2일자 북섹션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