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만남은 서로 목숨을 건 전투였을지 모르지만 소는 오랜 세월 사람과 함께 살며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것을 주고 간다. 우유와 고기만 아니라 가죽과 뿔과 발굽과 심지어 똥까지 모든 것을 주고 간다. 논밭을 갈고 성돌을 옮기며 무자위를 돌리고 방아를 찧으면서 소는 마침내 인간의 유전자도 바꾸었다. 사진=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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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보면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요사이 소는 날 때부터 아비를 모르고, 어미 곁에서 들녘을 거닐며 풀을 뜯지 않는다. 다행히 농군으로 짐꾼으로 혹사당하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한평생 사각형의 우사(牛舍)에 갇혀 좁디좁은 생을 살다 간다. 때가 되면 사료를 주니 바리톤 음색 우렁차게 울 일도 별로 없고, 때가 되면 물을 주니 혀를 날름거리며 코끝을 적실 일도 없고, 때가 되면 씨앗을 넣어주니 교미로 인한 스트레스도 더는 없을 터다.

  

언제나 소는 위안을 준다. 왕방울 같이 커다란 눈을 들어 무서운 듯 궁금한 듯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노라면 그 맑고 선한 기운에서 위안을 얻게 된다. 그러면서 소가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 사이에 아무런 편차도 없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소와 사람의 만남은 이제 연례행사거나 그 이상으로 드물어졌다. 소로부터 위안을 받기는커녕 소의 생태와 생리를 교과서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접할 기회조차 사라졌다. 소와 사람은 더 이상 생활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과 소의 벌어진 거리만큼 각박한 세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소는 날 때부터 아비를 모르고
     이 세상 잠깐 서너 평
     사각형의 각진 삶을 산다
     소는 그 큰 눈으로 줄지어 서서
     한 행인의 걸음에 놀라고
     걸음을 멈춘 그 멈춤에 놀라고
     성난 듯 겁먹은 듯 버티고 서서
     늘어진 목살 부푼 뱃살을 흔들어댄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면서
     낯선 짐승 구경하듯 끔벅끔벅
     큰 눈빛만 보낸다
     - 졸시, 「노구소 가는 길」 중에서

  

  

사람과 소의 만남은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만남은 서로 목숨을 건 전투였을지 모르지만 소는 오랜 세월 사람과 함께 살며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것을 주고 간다. 우유와 고기만 아니라 가죽과 뿔과 발굽과 심지어 똥까지 모든 것을 주고 간다. 논밭을 갈고 성돌을 옮기며 무자위를 돌리고 방아를 찧으면서 소는 마침내 인간의 유전자도 바꾸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수천 년 전에야 비로소 돌연변이가 생겨 우유를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인과 달리 아시아인은 여전히 우유를 소화하기 어려워하며, 그 같은 ‘유당 불내증’은 인간 유전자 변형의 강력한 증거이다.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에는 노구소가 있다. ‘늙은 소’가 아니다. 어릴 적 스승 원천석(1330-?)을 만나러 온 태종(太宗)에게 그의 행방을 거꾸로 가르쳐 준 노파가 임금님께 거짓을 고했다는 죄책감으로 몸을 던졌다는 물 깊은 웅덩이 노구소(老?沼)다. 여말선초의 혼란한 정세를 개탄하며 치악산에 은거했다는 원천석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물은 차고 깊다. 600여 년 동안 왕조는 무너지고 왜란과 호란과 일제를 거쳐 나라도 바뀌었지만 드센 물길은 유구하다. 또한 소는 노구소를 지나온 물을 마시며 이곳에 터 잡은 사람들과 함께 이어져 왔다.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법궁이 수창궁(壽昌宮)에서 경복궁으로 바뀌는 역성혁명 조선의 개국마저 100여 년이 지난 중종 조에 가서야 온 나라 민초들이 인지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거니와 여말 지식인 원천석의 명을 따라 선초 임금 태종에게 고한 몇 마디 말 때문에 산골 노파가 목숨까지 버렸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노구소 일대의 소는 민초와 함께 민초의 자식과 자기 새끼를 위하여 논밭을 갈고 풀을 뜯으면서 긴 세월을 무심한 듯 유심한 듯 대를 이어 살아 왔다. 그것은 세상을 초탈한 듯 초탈하지 않은 듯 한 생을 살다 가는 소의 보람이다.

  

  

     배고픈 시간에 눈을 떠
     배부른 시간에 잠드는 소는
     왕조의 몰락을 알 수 없고
     몰락한 왕조를 위하여 죽지 않으며
     머리부터 꼬리까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인과 주인의 자식과 주인의 손주에게
     오직 그런 자신의 운명에 자신을 바친다
     노구소로 향하는 질문자와는 상관없이 소는
     노구소를 거쳐 온 물을 마시면서
     노구소의 자손처럼 육중하게 살다간다
     - 졸시, 「노구소 가는 길」 중에서

  

  

일만 년 동안 소와의 거래를 일방적으로 인간에게만 유리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모든 것을 제공하는 전신위민(全身爲民)은 분명 인간의 삶에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또한 소의 말없이 유장한 생은 인간의 지적 성찰에도 큰 자극이었다. 소를 보며 서글픔을 떠올리고, 소를 보며 위안을 얻는 것은 성찰적 인간의 보편적 반응일지 모른다. 더 이상 노구소의 소들은 들녘을 거닐며 풀을 뜯지 않지만, 바로 그 노구소의 맑은 물을 마시면서 ‘횡성 한우’의 브랜드 가치를 지켜내고 있다. 그것 또한 인간 편에 유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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