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으로서 진정을 바친 단 한 편의 시를 갈망하는 것과 같이 새 시집을 내는 일 또한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 일탈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매우 교과서적인 결론을 다시 얻었다. 사진=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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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에도 그랬다. 그는 터질 듯한 만삭의 배를 거침없이 드러내고도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많은 젊은 학생들의 우상이었다. 아폴론과 비너스를 미적 기준으로 추종하는 스무 살들에게 전혀 호소할 수 없는 몸매임에도 적당한 음담과 음담 사이에 슬며시 공급해 주는 루카치(Georg Lukacs, 1885-1971)와 에스카르피(Robert Escarpit, 1918-2000)와 마담 슈탈과 태동기 살롱 문화는 갓 대학에 진학한 지적 지진아들을 흡인하는 효과가 컸다. 칸트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인용해도 순수이성이니 변증법이니 유물론이니 뻔한 총론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서지 정보를 당당하게 공개하며 펼치는 그의 유창한 논리는 단연 돋보이는 구인술(求人術)이었다. 

    

그는 또한 쏘가리와 꺽지와 감성돔과 벵에돔과 수많은 물고기들의 천적으로서 대동강 낚시계의 대를 이은 사람이다. 또 학내의 기라성 같은 강자들을 모두 물리친 기계(棋界)의 고수이며 소주 한 상자 정도는 거뜬히 마실 수 있는 주계(酒界)의 절대 고수이기도 했다. 참가자 수와 성비 등을 종합 고려해 소주 두 상자를 사들고 간 졸업 여행 둘째 날 아침, 달랑 십여 병 남은 텅 빈 상자를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잊을 수 없다. 그는 80년대 후반 대학가엔 보기 드문 진짜 낭만주의자였다. (물론 그는 한사코 자신을 회의주의자라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문학은 교실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시와 소설은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이룩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다. 하여 그는 수업을 빼먹고 집회 현장이나 술집을 찾아간 제자들을 타박한 적이 없고, 모종의 사건으로 수배령을 받은 후배의 강의를 대신 맡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틈틈이 제자들과 후배들과 학교 뒷골목 허름한 밥집에 앉아 선생이 아니라 선배 문인으로서 격의 없는 진짜 문학을 논했다.

    

그런 늘물 전영태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었다. 그의 음담과 육담의 통쾌한 즐거움과 작품을 분석하는 날카롭고 참신한 관점은 언제나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김소월의 「임과 벗」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젊은 남자의 고통의 편린인데, 늘물 선생은 “그대는 부르라, 나는 마시리"에 특별히 주목하여 다른 시편에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던 소월의 ‘신(神)’적 간절함을 권주가(勸酒歌)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에게 ‘부르라’는 ‘부어라’로 들렸을 것이다.)

    

     벗은 설움에 반갑고

     임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 향기로운 때를

     고추의 붉은 열매 익어 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 중략 -

 

     슬퍼하고 기뻐하는 우리의 마음의 신비를 믿고

     그 신비를 빚은 신비

     절대도록 차이 없는 신의 뜻을 깨달으면

     비로소 그대를 만나리라 하였다.

 

     아름다운 이여!

     - 김소월(1902-1934), 「임과 벗」 중에서

    

또한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로 시작하는 육당 최남선(1890-1957)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펼쳐나갈 소년에게 바치는 축시가 아니라, 쉬지 않고 배를 때리는 파도의 ‘철석거리는’ 운동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정력적인 사랑가로 분석됐다. 늘물 선생과 묵호항 등대해양문화공간을 찾아가 정말 ‘쉬지 않고’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의 정력적인 모습을 보며 사랑을 예찬한 적이 있다.

    

늘물 선생을 만나러 가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종로를 지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거쳐 동호대교를 건넜다. 압구정동을 거쳐 대치동과 도곡동을 거쳐 버스는 돌고 돌아갔다. 해거름 전에 출발했지만 길을 잘못 들어 헤맨 끝에 다저녁이 되어 도착했다. 늘물과 그의 애제자들은 벌써 화기애애 북적북적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탕수육과 오향장육과 우육탕면이 나오고 소주와 맥주병이 테이블 귀퉁이를 가득 채울 무렵 첫 자리를 마치고 양재천 둑방 산책로로 나왔다. 바람 부는 봄날의 천변에는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 전에 나는 예버덩에서의 ‘자유의 기록물’인 새 시집 원고를 늘물 선생에게 보내어 대비평가의 자문을 구하고자 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제 일흔 살의 원로 교수인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지복이 내게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그러나 스승의 일갈(一喝)을 듣기에 식당의 왁자한 분위기며 애제자들의 활기찬 발언들이 너무 많았다. 마치 입학시험을 치른 뒤 긴장 속에서 당락을 확인하는 순간처럼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뱉은 끝에 천변 산책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입가심을 위한 술자리가 이어졌고, 마침내 선생은 ‘공부를 너무 많이 했다.’는 짧은 논평을 해 주었다. 시인에게 ‘공부 많이 했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으나, 이상하게도 나는 ‘수고 많이 했다.’로 들었다. 그가 소월과 육당의 시를 마음껏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것과 같이 나도 스승의 일갈을 감히 내 마음대로 들었으니 이것도 내림이자 대물림인가.

    

늘물 선생은 또 비평가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기주장을 고집불통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비평가는 고집쟁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시인’은 똥고집쟁이가 되어야 한다. 시인으로서 진정을 바친 단 한 편의 시를 갈망하는 것과 같이 새 시집을 내는 일 또한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 일탈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매우 교과서적인 결론을 다시 얻었다. 모처럼 나이 든 스승과 또 후배들과 함께 설레는 자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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