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이 모처럼 달리는 분주하지 않은 시골길은 자유로운 활력을 충전하는 길이다. 사진=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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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대는 지하철 안에서 쉼 없이 볼 터치를 하는 샛노란 머리칼의 여학생은 예쁘다. 그 옆에서 눈을 치켜뜨고 연신 섀도우 브러시를 움직이는 트렌치코트의 아가씨 또한 예쁘다. 예쁘지 않은데도 예쁘게 보아야 해서 예쁜 게 아니다. 실로 예쁘다.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는 당당한 표현주의와 우호적 생존 환경을 유도하는 어떤 미적 행위도 자연스럽기만 하다.

      

한국인의 밥상’(KBS)에서도 그랬지만 화장기가 겉도는 쭈글쭈글한 거친 피부의 시골 할머니들은 아름답다. 횡성 만세공원 버스 정류장에 앉아 두세 시간은 거뜬히 농어촌버스를 기다릴 줄 아는 화장기 겉도는 할머니들은 아름답다. 조금이라도 단정하게 매무새를 가다듬는 그 정당한 여성성과 화학제품과 생물학적 피부 사이의 과감한 불일치가 아름답다.

      

한 손으로 장바구니를 부여잡고 한 손으로는 버스 좌석을 잡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주머니는 건강하다. 꽃무늬 목도리와 털모자를 쓴 아기를 안고 그만한 젖먹이 용품 가방을 든 젊은 엄마도 건강하다. 초봄의 농어촌버스는 네댓 명 건강한 승객을 태우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소리치며 달려간다. 차가 많지 않으니 소리는 더 크게 들리고, 하루 서너 번밖에 다니지 않으니 힘이 남아서도 크게 소리친다.

      

번드르르한 환경론자들의 절대주의가 얼마든지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과 같이 여성성이니 생명력이니 하는 추상화된 이념도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환경운동과 여성으로부터 분리된 여성주의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전형적인 타락 양상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진정한 여성성은 할머니와 여학생과 아주머니와 젊은 엄마들의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 삶에 있고, 진정한 생명력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고통과 생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휘청거리는 허약한 우리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횡성과 안흥과 둔내에서 발견한다. 그들의 표내지 않는 낱낱의 생활 속에 참다운 생의 에너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편편마다 개성을 담아야 하고, 구절구절마다 고유한 표현을 얻어야 하는 시의 세계를 위해 예버덩문학의집에 입주하기로 한 결정은 옳았다. 그런 터수를 딛고 시집 원고 정리와 시론서 집필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일주일이 되도록 본업은 시작도 못했다. 서울에다 떨쳐 버리고 오지 못한 관성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다.

      

횡성에 있는 내 몸이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고 있다. 나와 서울을 연결한 초고속통신망은 보이지 않는 절대 괴물에 가깝다. 이것이야말로 AI 시대를 맞은 고도 정보화 사회의 또 다른 구속인가. 세상에서 가장 남성적이지 못하고 제일 건강하지 못한 인간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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