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碑文)은 소다(曾田) 선생에 대해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867년 10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山口) 현에서 출생했다. 1913년 서울에서 가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을 창설하매,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孤兒)가 수천이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소다 가이치의 묘지와 비문. 사진=장상인

 

사회사업가(社會事業家)의 사전적 의미는 ‘공중의 생활 개선, 보호 등 사회 복지에 관한 비영리사업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사회사업을 하던 인사들이 검찰 수사까지 치닫는 상황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를 들어 ‘정의연’ 출신의 윤미향(56) 의원의 경우다.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일본인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가 잠들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찾았다. 지난 주말의 일이다. ‘일본인이면서 한국 고아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았던 그의 생(生)이 오히려 교훈적이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가다
 
마포구 합정역에서 이정표를 따라 절두산 방향으로 내려가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이 나온다. 입구에 묘원의 지난한 역사가 한글과 영어로 길게 쓰여 있다.
 
“양화진(楊花津)은 조선시대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기에 영조 30년(1754) 군진이 설치되었다. 조선 조정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양화진까지 들어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으며, 그로 인해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복음이 선교사에 앞서 전해진 한반도에는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 1885년 이래 서양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였다. 1890년 7월 미국인 의료 선교사 헤론(Heron)이 사망하자 미(美)공사관은 조영통상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조선 조정에 묘지를 요구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몇 차례의 담판 끝에 한양에서 멀지 않은 양화진 인근 땅을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주한 미군의 묘지로도 쓰였다."
 
면적 13,224평방미터인 이 묘원은 선교사와 그 가족을 포함해 417명이 잠들어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5개 나라에 이른다.
 

 

사색의 공간 안내문.

묘원에 들어서자 서울시와 마포구가 함께하는 캠페인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 근대화와 기독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약 한 세기 동안 기독교 선교와 근대화에 기여한 이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격동의 시대에 조국을 떠나 기독교 신앙과 근대문물을 전한 선교사들의 헌신을 기억하며, 이웃을 향한 나의 마음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자기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은 물론 교육·의료 봉사 등을 하는데 정작 우리는 어려운 이웃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
 
필자는 묘역의 계단을 오르면서 스스로 반성해 보기도 했다.

 

 
묘역에 들어서면 각기 색깔이 다른 비석들과 안내문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다. 녹음이 우거진 묘역은 고요했다. 맨 먼저 헤론(John W. Heron 1856-1890)의 묘소와 마주했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이다.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헤론(Heron)
 
묘역에 들어서면 각기 색깔이 다른 비석들과 안내문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다. 녹음이 우거진 묘역은 고요했다. 맨 먼저 헤론(John W. Heron 1856-1890)의 묘소와 마주했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이다. 그는 미국의 테네시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1885년 6월 21일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알렌, 언더우드 등과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그 당시 조선의 의료 시설을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이질에 걸려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이다. 그는 미국의 테네시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1885년 6월 21일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알렌, 언더우드 등과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헤론의 묘지.

“부인! 내가 떠나더라도 조선에 계속남아서 선교활동을 계속해 주시오."
 
헤론의 유언대로 그의 아내와 외손자 등 세 명이 나란히 양화진에 묻혀 있다. 필자는 헤론의 묘소에 목례를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선생의 묘소에 있는 안내문에도 ‘소다(曾田) 선생의 업적과 함께 그가 한국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상세히 적혀 있다.

한국 고아의 자애로운 아버지(慈父)   

 
5분 쯤 걸어가자 ‘소다 가이치’의 묘소가 나왔다. 8년 전에 잠깐 다녀간 적이 있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이유를 비문(碑文)을 통해서 설명한다.
 
“소다(曾田)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867년 10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山口) 현에서 출생했다. 1913년 서울에서 가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을 창설하매,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孤兒)가 수천이리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속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盡力)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懺悔)를 순회 역설했다. 95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가마쿠라보육원(鎌倉保育院)’ 자리에 있는 ‘영락(永樂)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長逝)하니 향년(享年) 96세라. 동년(同年)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 연합으로 비(碑)를 세우노라. 1950년 1월. 부인 다키코‘ 여사도 서울에서 서거(逝去)했다."(나이는 음력과 양력이 혼재).
 
선생의 묘소에 있는 안내문에도 ‘소다(曾田) 선생의 업적과 함께 그가 한국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상세히 적혀 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그의 젊은 시절은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소다(曾田)’가 (대만에서) 술에 만취된 채 노상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이 때 무명의 한국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05년 ‘소다(曾田)’는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한국에 와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이 되었다."
  
‘성(性)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은혜를 갚기 위해 조선을 사랑했다?’
 
참으로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 아닌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름 모를 한국 사람을 위해 그 나라에 헌신한다’는 마음가짐- 그야 말로 진정한 인간애를 지닌 사람인 듯싶다. 이를 뒷받침하는 글은 일본의 원로 역사학자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76)’의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에도 담겨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巧) 씨의 장례식에서 성경을 읽은 경성 감리교회의 전도사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는 ‘조선 고아의 아버지’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1867년 일본의 야마구치(山口) 현에서 태어나 1905년 조선으로 건너갔다. 1899년 대만에 있을 때 길가에 쓰러져 있던 그를 조선인이 살려줘서 은인(恩人)의 모국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소다 가이치. 그는 1962년 3월 28일 상오 서울 용산구 후암동 370번지 영락(永樂) 보린원에서 별세했다. 선생의 죽음에 대해 많은 조선인들이 슬퍼했다. 그의 장례식은 한국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정부·사회단체 관계자 및 시민 2,000여명이 참가했다. 그 당시 언론들은 ‘국경과 민족의 벽을 넘은 진실의 사랑과 봉사자’라고 대서특필했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영락 보린원.
95세의 나이에 다시 한국에 오다
 
가마쿠라(鎌倉) 보육원의 경성지부는 한국에서 근대식 고아원의 효시였다. 소다는 해방 후 일본에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에 왔다. 영락 보린원에서 일년 여 동안 기거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평소 가슴에 간직했던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이뤘던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 정부는 1961년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의 일이라 이례적인 일로 평가됐었다. 그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는 생전에 고아들을 돕기 위해 식품이나 의류가 동이 나면 헌옷이나 식료품을 모집하러 다녔다. 일본인들은 그를 보면서 ‘국가의 수치(羞恥)다’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고아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는 일에만 몰두했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데, 고아들을 돌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필자는 하늘을 뒤덮을 만큼 커다란 느티나무(1981년 보호수 지정) 아래서 땀을 닦으면서 정연희 작가의 소설 <양화진>의 한 대목을 떠올려 봤다.
 
“하나님의 사랑의 각본 속에는 갖가지 배역이 있다. 그 배역 중에서 사랑의 전도자 역을 맡을 수 있었던 행복한 사람들의 배역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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