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히은 반한(Hean Vanhan) 캄보디아 농수산부 차관, 펜 소치웃(Penn Sovicheat) 상무부 차관, 쏙 쏘쿤 관광부 차관보.

“캄보디아가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치안이 안전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한인 타운(Korea Town)을 만들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한국인뿐 만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살고 계시는 재외동포들도 참여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3S 컨설팅 코리아(Consulting Korea) 강원식(68) 회장의 말이다. 미국·중국 등에서 성공적으로 기업을 운영해온 강 회장은 얼마 전부터 캄보디아에 눈을 돌렸다. 잠재력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환으로 강 회장은 캄보디아의 관료들을 한국에 초청해서 한국 전력 등 대기업을 방문하도록 했으며, 지난 달 15일 국회에서 열린 ‘2020 경제문화교류 포럼’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필자는 강원식 회장과 함께 캄보디아의 관료들과 만났다.

 

미국·중국 등에서 성공적으로 기업을 운영해온 강원식 회장은 얼마 전부터 캄보디아에 눈을 돌렸다. 잠재력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의 기술과 농업 환경을 한국에 알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한국의 발전 속도가 무척 빠르다는 것입니다. 정부와 국민이 합심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서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아시다시피 땅이 넓습니다. 야채나 곡물 등 재배할 땅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한국의 농업 기술을 캄보디아에 도입함은 물론 캄보디아 농민들을 한국에 보내서 기술을 배우도록 하는 것도 방한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농수산부 차관 히은 반한(Hean Vanhan) 씨의 말이다. 캄보디아는 기원전 2000년부터 가축 사육하고 쌀을 경작했던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이 지역에 인간들이 살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메콩강 하류에 위치한 해안지역에서는 기원전 2천년 무렵부터 가축을 사육하고 쌀을 경작했었다. 또한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청동기와 철기 등의 금속을 사용했었다(지식백과).
 
“의류, 신발, 알루미늄, 고무 등 한국과 캄보디아가 무역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금액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2018년 양국의 무역 규모는 746,385m$에 달합니다. 이는 전년대비 약 20%가 증가한 것입니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상무부 차관 펜 소치웃(Penn Sovicheat) 씨의 말에서도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미 캄보디아에는 건설·부동산, 식음료 등 이미 많은 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이어서 관광부 차관보 쏙 쏘쿤(Sok Sokun) 씨는 앙코르 와트 유적지를 비롯해서 관광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앙코르 와트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한국의 관광객들이 세계 3위를 차지할 만큼 많이 찾아 주십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타일랜드 해(海)와 연해 있는 시하누크 빌(sihanoak ville)의 해안이 절경입니다. 이 지역도 주요 관광지로서의 환경적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다. 이 나라에서 앙코르 와트를 빼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불교의 3대 성지(聖地)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사원이어서다.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초 크메르제국의 왕인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서 왕조를 위한 사원으로 만들어졌다. 앙코르 왕조의 멸망으로 정글 속에서 잠을 자다가, 프랑스인 박물학자 ‘앙리 무오’에 의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861년의 일이다.
 
이번에 한국을 찾은 캄보디아의 관료들은 모두 8명이었다. 이들의 얼굴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필자는 때마침 신의철 박사의 저서 <내일이 더 빛나는 나라, 캄보디아>와 접했다. 그의 저서 머리말에 있는 글이다.
 
<캄보디아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어떤 사람들은 앙코르 와트 유적과 크메르제국의 영광...외세의 끊임없는 침략과 내전, 특히 폴 포트와 킬링필드로 알려진 현대사의 비극을 통해 희생된 이들을 떠올릴 수 있다...하지만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빛나는 나라이기도 하다.>
 
필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근무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빛나는 나라, 캄보디아’
책의 제목처럼 캄보디아에는 분명 우리가 잘 모르는 힘의 원천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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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일본의 벼농사 기원
 
일본의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遺跡)은 규슈(九州)의 사가(佐賀)현 간자키군(神埼郡) '요시노가리' 마을과 '간자키시(神埼市)'의 구릉 약 50헥타르에 걸쳐 있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의 환호취락 유적지다. 1986년에 발굴돼 현재는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으로 지정된 후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야요이시대(彌生時代)’의 특징 중의 하나는 벼농사의 시작이다. 수렵이나 채취에 의해 불안정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벼(稻) 등 작물 재배에 의해서 안정된 생활로의 변화를 도모했다. 이에 대한 내용이 ‘도해 일본사(成美堂出版)’에도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조오몽시대(繩文時代, BC 14,000-BC 300)로부터 야요이시대(彌生時代, BC 300-AD 250)로 이행되는데 있어서의 큰 변화는 채취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의 전환이다. 기원전 5세기 전후에 조선반도에서 전해진 벼농사는 불안정한 생활을 했던 그들에게 안정된 생활로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다.>
 
‘야요이시대(彌生時代)’는 약 600년간 지속됐다. 벼농사의 시작과 함께 야요이(彌生) 토기가 구워졌으며, 철기 사용과 함께 소국가(小國家)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 야요이(彌生) 문화가 바로 우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는 책에서 이 부분을 명확히 밝혔다.
 
<벼농사는 오늘날의 유전공학처럼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인 분야이고, 고도의 기술이 집적(集積)되어야 가능한 원예농업이었다. 몇 명의 기술자가 아니라 기술자들이 대거 이주한 다음에 오랜 기간에 걸쳐 끈질기게 시험재배를 한 끝에 비로소 정착할 수 있는 산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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