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기념관 입구의 안내판. 사진=장상인
“판사 스스로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사법권의 독립을 지킬 수 있습니다. 가슴에서 울리는 정의(正義)의 목소리를 듣고, 자발적으로 본 사건에서 사퇴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명령하는 양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일찍이 사회 정의를 위해서 호령하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사람들은 그를 ‘일본의 쉰들러’라고 부른다.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검사직을 내던지고, 어려운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한 인권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요즈음 ‘검찰 개혁’ 문제로 갈라진 모습들을 보면서 ‘명령하는 양심’ 후세 다쓰시 변호사를 떠올려 봤다.
       
후세 다쓰지는 일본천황에 대한 폭탄투척 모의 혐의로 법정에 선 박열(朴烈, 1902-1974)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3)의 무죄를 주장했다. 두 사람의 옥중결혼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는 가네코가 옥사(獄死)하자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서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보내는 일에도 앞장섰다.
 
박열 기념관을 찾아서
  
필자는 지난 2일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을 찾았다. 고불고불 한적한 산골마을을 달리는 기분도 오랜만에 맛보는 즐거움이었다. 자연도 사람도 넉넉했기 때문이다. 박열의사기념관 입구에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조선의 아니키스트 박열’의 포스터와 기념관에 대한 안내문이 있었다.
 
<박열기념관은 독립운동가 박열이 보여준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후손들이 그 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2012년에 개관하였다. 기념관 내부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148호로 지정된 박열의사의 생가가 위치하고 있으며 선생의 동지이자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안내문을 읽는 동안 ‘컹컹컹’ 송아지만한 누렁이가 이방인을 위협(?)했고, 낮과 새벽이 헷갈렸는 지 ‘꼬끼오’ ‘꼬끼오’ 목청을 높이는 수탉도 있었다. 잘 다듬어진 언덕길을 따라 기념관으로 올라가자 키 작은 나무에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유난히 붉은 단풍나무가 가을의 운치를 더했다.
 
‘가을은 가을이로다.’
 
기념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왼편 벽에 붙어 있는 박열의 ‘강자의 선언’이 한눈에 들어 왔다.
 
“장대 같은 빗방울이 돌을 부수고 또 깨트리듯
자유의 전사는 죽고 또 죽인다...동포여! 싸우고 또 싸워라!"
 
박열의 혁명적 의지가 강력하게 내재된 글이었다. 이글은 선생이 1926년 1월 1일 이치가야(市ケ谷) 형무소에서 썼다. 다시 건물 로비로 들어가자 책을 무릎에 놓고 앉아 있는 박열 선생의 동상과 조소앙(1887-1958) 선생이 쓴 글이 있었다.
 
  
박열의 동상과 조소앙의 글

 打倒天皇之先鋒
 開闢民主之建物
 (천황을 타도하는 선봉에 서시고, 민주를 개벽하는 건물이 되시다.)
 
박열 기념관에 만난 후세 변호사의 흔적들
  
그토록 타도하고 싶었던 일본. 그런 가운데서도 박열은 동지적인 일본인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해서, 그의 최고의 변호사이자 후원자인 후세 다쓰지가 그러하다. 후세 다쓰지를 박열에게 소개한 사람도 일본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885-1923)였다. 오스기 사카에는 작가이자 사상가이며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메이지(明治)와 다이쇼(大正) 시대에 노동운동가로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후세 다쓰지의 생애
후세 다쓰지는 저서 <운명의 승리자 박열>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책은 대역 사건을 중심으로 한 박열 군의 단면일 뿐 박열 군에 대한 자세한 평전도 아니고 완전한 전기도 아니다...그러나 대역사건을 중심으로 한 박열 군의 단면에 있어서는 박열 군이 일본으로 건너온 직후 부당하게도 단발 사건을 겪은 뒤부터 잡지 ‘불령선인’의 발행과 흑우회 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협력관계에 있었다...필자는 대역사건의 변호인이 되었고, 이후부터 24년 동안의 친교를 옥중에서도 지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박열기념관에는 두 사람의 긴 인연에 비해 기록과 유품들이 많지는 않았으나, 나름 의미가 있어 보였다.
 
후세의 생애는 5단계로 나뉘어서 일목요연하게 도표와 사진으로 정리돼 있었다. ▲출생에서부터 메이지 법률학교 졸업과 검사대리 보직 사임 ▲변호사 등록과 일반적인 선거 운동 ▲자기혁명의 고백·변호사 제명 ▲박열과 가네코 변호·변호사 활동 정지 ▲전후 변호사 활동 재개와 사망에 이르기까지 간단한 설명도 곁들어져 있었다.
 
‘박열의 후원자 후세 변호사’라는 타이틀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옳고 약한 자를 위해 나를 강하게 만들어라. 나는 양심을 믿는다."
 
 
박열의 후원자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는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변호사이면서 법률가와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는 일생을 인도주의적 전사로 자유·평등·민권을 추구하며 약자를 위해 몸 바친 고귀한 정열을 지닌 변호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후세 다쓰지는 ‘살아서는 민중과 함께 죽어서도 민중을 위해’라는 좌우명을 좆아 일본 민중뿐만 아니라 당시 핍박받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제 강점기 하의 조선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의열 변호사이자 해방 운동가였다.>
 
 
박열의 동반자 가네코 후미코

<박열은 1921년 10월 ‘혈권단’을 조직해 활동 할 때부터 후세 변호사와의 밀접한 연대 속에 서로 의논하고 협력했다. 그 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흑도(黑濤)’와 ‘후토이센징(太い鮮人)’에 이어 현사회(現社會)를 발간할 때 광고란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벗, 변호사계의 반역자 후세 다쓰지’가 빠짐없이 실려 있었다. 이들은 동지적 관계를 넘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였다.>
 
<후세 다쓰지는 박열의 변호인으로 시종일관 그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수감 중인 박열을 여러 차례 면회했다. 특히, 대심원 공판에 임하는 박열의 조건을 사법당국과 절충하는 등 공판 준비와 교섭, 사후 처리를 도맡아 동지애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글과 일본어로 된 설명문은 후세 변호사와 박열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정리돼 있었다.
 
진실 된 인간관계에는 국경이 없어
  
“후세 변호사는 그 당시 박열 선생과 가네코 님에게 엄청난 후원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들의 관계를 열심히 설명을 드려도 사람들은 후세 변호사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념관의 오지훈(32) 학예연구사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일본인 신분으로 조선인을 돕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인데도 몰라주기 때문이란다.
 
 
후세의 친필 휘호에 대해서 설명하는 오지훈 학예연구사

硏適材生適所(적성을 개발해서 적소에서 일해라.)
 
후세 변호사의 휘호를 읽고 있는 필자에게 오지훈 학예연구사가 다시 말했다.
 
“이 휘호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1992년 자신의 따님에게 써준 원본입니다. 기증은 그 분의 자제이신 오이시 스스무(大石進) 씨가 했습니다."
  
후세 변호사의 딸이라면 필자가 알고 있는 오이시 스스무(84) 씨의 모친이 아닌가.
필자는 오이시(大石)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저, 한국 경상북도의 문경이라는 곳에 와 있습니다."
“아? 문경까지 가셨나요? 반갑습니다. 저도 2012년 박열기념관 오픈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께서 기증하신 후세 다쓰지 님의 친필 휘호를 보고 있습니다. 퍼즐을 맞추다보니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님께서 간직하시던 휘호를 기증하셨군요. 조만간 일본에 가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작품입니다. 도쿄의 YMCA에서 만납시다. 거기에도 자료가 있습니다."
 
살아서는 민중과 함께, 죽어서도 민중을 위해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박열과 함께 하고 있었다.
  
기념관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더욱 높아졌고, 가을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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