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과 지적 사기, 이인식 기획, 인물과사상사(2014년).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은 (편집자註 2014년) 6월 중순 준공된 기초학부 건물을 `컨실리언스(consilience)홀`이라고 명명했다. 아마도 컨실리언스가 융합(convergence) 연구 중심 대학임을 표방하는 데 안성맞춤인 용어라고 여긴 듯하다. 포항공대 역시 신축 중인 건물을 상징하는 키워드의 하나로 컨실리언스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컨실리언스가 우리나라 공과대학의 융합 교육 방향을 제시하는 개념이 된 셈이다.
  
컨실리언스는 `(추론의 결과 등의) 부합, 일치`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그런데 미국의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1998년 펴낸 저서 `컨실리언스`에서 생물학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을 통합하자는 이론을 제시함에 따라 컨실리언스는 윌슨 식의 지식 통합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로도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컨실리언스는 원산지인 미국에서조차 지식융합 또는 기술융합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미국과학재단과 상무부가 2001년 12월 융합기술(convergent technology)에 관해 최초로 작성한 정책 보고서인 `인간 활동의 향상을 위한 기술의 융합`이 좋은 보기이다. 이 역사적인 문서에 의견을 남긴 100여 명의 학계·산업계·행정부의 전문가 중에서 기술융합을 의미하는 단어로 컨실리언스를 언급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공과대학 교수들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과학기술자들이 컨실리언스를 기술융합과 동의어로 즐겨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진=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홈페이지 캡처.

  
2005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컨실리언스`의 제목은 `통섭`이다. 번역자가 만들었다는 용어인 통섭에는 원효대사의 사상이 담겨 있다고 알려져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학식과 사회적 지명도가 꽤 높은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서 통섭이 융합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생뚱맞게 사용된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얼마나 많은 저명인사들이 현학적인 표현으로 통섭을 남용했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불교 사상에 조예가 깊은 시인으로 알려진 김지하가 2008년 10월 인터넷 신문의 연재 칼럼에서 통섭이 오류투성이의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김지하는 원효대사가 저술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언급하면서 윌슨의 지식 통합 이론과 원효의 불교 사상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모든 학문을 통합할 수 있다는 믿음, 물질보다 높고 큰 존재인 생명, 그보다 높고 큰 존재인 정신과 영을 더 낮은 물질의 차원으로 환원시켜 물리적 법칙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그것이 통섭이다. 그렇게 해서 한 번이나마 통섭이 되던가?"
  
김지하는 번역자에게 자신이 제기한 쟁점에 대해 응답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으나 번역자 쪽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거나 여러 학자들이 컨실리언스와 통섭을 비판한 논문을 발표했지만 문제투성이의 개념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특히 2013년 봄부터 박근혜정부의 제1 국정목표인 창조경제의 핵심 개념으로 융합이 제시되면서 통섭도 덩달아 융합과 같은 뜻으로 거론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2013년 1년 내내 창조경제를 추진하는 미래창조과학부의 고위공무원은 물론이고 대덕연구단지의 공학박사들까지 너도나도 통섭 노래를 불러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의 경우도 그런 시류에 편승한 것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DGIST와 포항공대 관계자 여러분에게 컨실리언스와 통섭의 오류를 지적한 김지하 시인, 박준건 교수(부산대 철학과), 이남인 교수(서울대 철학과) 등의 글이 집대성된 `통섭과 지적 사기`의 일독을 권유하고 싶다. 출처=매일경제 ‘이인식과학칼럼’ 2014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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