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이 맹자의 위 말에서 근본적으로 간과한 부분이 있다. 바로 웅덩이를 다 채워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지만, 채우고도 넘쳐서 더 나아갈 수 있으려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원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월 1일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관련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
 
원천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 모든 웅덩이를 다 채운 뒤에야 나아가서 바다에 이른다.
     
맹자가 강조한 이 말은 모든 일은 그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야지 함부로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시간 들여 기초를 다지는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를 빨리 도출하는 것만 능사로 삼는 풍조가 만연한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뼈저린 교훈이다.
    
2019년 예산안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문 대통령이 위 구절을 인용했는데 먼저 그 내용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 경제 체질과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 불평등을 키우는, 과거의 방식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물은 웅덩이를 채우고 나서야 바다로 흘러가는 법입니다."
     
맹자(孟子·기원전372~289). 중국 전국시대 추나라 사람으로 공자 사상을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결국 문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수많은 미사여구로 포장되었지만 한마디로 '현 정권의 정책방향이 옳으니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함께 잘 살기’ 위한 성장전략으로 제시한 '소득주도 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계속 변함없이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맹자의 위 말에서 근본적으로 간과한 부분이 있다. 바로 웅덩이를 다 채워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지만, 채우고도 넘쳐서 더 나아갈 수 있으려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원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끊임없이 솟아나는 원천이 없다면 장마철에만 가득 차서 흐르다 이내 말라버리는 도랑과 같이 정부의 정책은 결국 난관에 부딪혀 유야무야되거나 퇴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의 근본을 보면 '선한 의도'로 잠시 '좋은 말'과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원천이 깊지 않아' 결코 오래 지속할 수 없는 것들이다.
     
2009년 이후 최고 증가치인 올해보다 9.7% 증가한 470조 슈퍼예산으로 '일시적인 퍼주기'는 가능하겠지만 경제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과연 얼마나 지속가능하겠는가.
 
임금인상 위주의 소득주도 성장은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경기진작을 도모할 수는 있으나 그 효과가 제한적이고 빨리 소진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웅덩이를 모두 메우고 바다로 갈 수 있겠는가.
  
노동 개혁, 규제 완화, 구조 조정 등 뼈를 깎는 개혁이 이루어져 경제에 새 피가 돌아야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어떻게 모든 웅덩이를 메우고 바다까지 가겠는가. 
 
결국 '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원천'이 필요하고 만약 원천이 잘못되었다면 즉시 다른 원천을 찾아야 하듯이 문 대통령도 잘못된 정책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 아니라 즉시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첫째, 문 대통령은 포용국가를 말하기 전에 불평등의 핵심은 양극화인데 현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 소득주도 성장을 밀어붙이는 동안 소득 하위 20% 계층의 소득은 9% 줄어든 반면 소득 상위 10% 집단은 오히려 소득이 8.6% 늘어난 아픈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무리한 소득주도 성장이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소득을 줄여 불평등 구조를 더욱 고착화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둘째, 문 대통령은 내년도 일자리에 세금을 더 퍼붓기 전에 정부 출범 후 두 차례 추가경정예산 등을 통해 마련한 일자리 예산 54조원이 어디로 갔는지부터 반성해야 한다.
 
즉 내년도 일자리 예산을 올해 19조원에서 23조4천억원으로 확대하기 전에 올해 청년 추가 고용 장려금이나 내일채움공제의 집행률이 극히 미진한 사실을 반성해야 한다. 정작 현장에서는 쓰지도 못 하는 돈을 내년 예산안에 증액하는 것이 과연 앞뒤가 맞는가.
  
셋째, 문 대통령은 세수호황이라 재정을 확대할 여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기획재정부의 국가재정 운용 계획(18~22년)상의 모든 재정지표는 악화하고 있으며, 내년도 적자 국채발행은 올해보다 1조3천억원 증가한 30조1천억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정부 재정은 무한하지 않으며,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재정 건전성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넷째, 문 대통령은 북한에 퍼주기 위해 남북협력기금을 올해보다 14.3% 증가한 1조1천억원 수준으로 확대하기 전에 현재 고착상태에 빠진 비핵화 협상과 이로 인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실질적인 비핵화가 첫발도 떼기 전에 남북 간 철도와 도로 연결, 산림협력, 이산가족 상봉 등의 예산만 대폭 증액하는 것이 과연 선후가 맞는가.
  
결국 문 대통령의 이번 시정연설은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오로지 '장밋빛 청사진'만 나열한 '말의 성찬(盛饌)'에 불과한 것이다. “국민 단 한 명도 차별받지 않는 나라가 돼야 합니다"라는 말의 울림은 컸지만 '어떻게'가 빠져있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것은 내년도 나라살림에 대한 송곳같은 철저한 검증뿐이다. 당장 '예산대전'의 선봉에 선 예결위 여야 간사가 “남북협력 예산은 한 푼도 삭감할 수 없다(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의원)" “리모델링이 아닌 신축 수준으로 바로잡겠다(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모든 예산은 성실하게 일한 국민과 기업이 빚어낸 결실이다. 오로지 국민의 뜻에 의해, 국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먼저 정부와 국회는 '예산이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천하의 공론(公論)을 모아야 한다. 고통받는 민생을 챙기고, 경제를 살리며, 남북관계의 속도조절을 해 달라는 국민들의 '진짜 목소리'를 두루 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도 두 눈 부릅뜨고 예산이 실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토크빌의 말은 불변의 진리다.
 
ⓒ 서울스트리트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