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대응과 오판이 정권의 핵심부 분열, 그 적나라한 장면이 10·26...한국 현대사의 교훈은 아직 유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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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사태(왼쪽)와 10·26 당시 궁정동 현장. 1979년 김재규는 부마사태에 대한 오판으로 10·26을 일으켰다. 그는 박선호 과장의 권총으로 차지철을 쏜 다음 박정희 대통령을 쐈다. |
올해 10월은 한국 현대사 30년을 결정한 ‘부마사태’와 ‘10·26 사건’ 40주년의 달(月)이다. 대한민국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로 만들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임기 절반을 마치는 월(月)이기도 하다. ‘조국(曺國) 사태’로 촉발된 세 차례(10월3일, 10월9일, 10월25~26일)의 자유진영 대규모 국민집회가 ‘국민혁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자유혁명의 달’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조갑제(趙甲濟) 기자가 30년 전 출간한 《有故》을 보완해 재(再)출간했다. ‘부마사태에 관한 독보적 기록’으로 평가받았던 《有故》는 이번에 《한국을 뒤흔든 11일간: 부마사태에서 10·26까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왔다. 부마사태가 시작된 1979년 10월16일이 올해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더욱 뜻깊다.
조 기사는 “부마사태 40주년을 기념한 기록영화의 인터뷰에 응한 것을 계기로 30년 전에 냈던 책을 다시 재구성해 출간하게 됐다"며 “부마사태부터 10·26 사건까지의 11일간은 대한민국 현대사 30년을 결정한 국민적 ‘함성’이면서 ‘총성’이었다"고 말했다.
부마사태는 저자가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서 부산에서 현장 취재한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던 유신 체제에서 발생한 부마사태는 ‘기사로 쓸 수 없는’ 사건이었다. 취재 지시는 없었지만 조갑제 기자는 현장을 지켰다. 당시 그는 ‘이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라고 하나님이 나를 기자로 만들었다’고 여기고, ‘신문에 낼 수는 없더라도 역사의 기록으로서 정리해두고 후배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0·26 사건은 조선일보 월간조선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한 것이다. 부산시위로 시작, 마산으로 번져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쏘기까지,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11일간의 긴박한 순간을 글로 되살리기 위해 조갑제 기자는 7년간 500명의 관계자를 만났다.
부마사태는 조갑제 기자의 인생 항로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 기자는 부마사태를 시작으로 10·26 사건, 12·12 군사변란, 1980년 5·17 계엄확대, 5·18 광주사태로 이어지는 질풍노도의 시간대에 휩쓸려 들었다. 병가(病暇)를 내고 광주사태를 취재하러 갔다가 회사에서 잘렸고, 반(反)정부 기자로 찍혀 있었던 그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확인사살(퇴사한 것도 모르고 해직기자 명단에 올림) 당했다. 조 기자는 박정희 정권 때는 정부의 포항 석유 발견에 이견을 제시한 논문을 썼다가 해직되기도 했었다.
“부마사태의 이유를 여럿 들 수 있지만 요사이 조국 사태와도 연관되는 요인으로서 국민들의 분노가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성은 사후(死後)에 확인된 일이고 당시를 살고 있었던 학생, 기자, 정치인, 지식인들 속에선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보다는 정치적 압박에 대한 저항이 강했다. 여기에 경제불황과 부가가치세에 대한 상인들의 반감이, 부산대학생들의 시위로 한덩어리가 되어 폭발한 것이다."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며 사명감으로 기록을 남겼던 저자는 재출간 머리글에서 ‘조국(曺國) 게이트’에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2019년 10월 현 세태에 대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분노가 폭발하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한국 현대사의 교훈은 아직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