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시혁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지난 2월 2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제73회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DB |
'인터내셔널 파워 플레이어스'는 2014년부터 빌보드가 매년 세계 음악시장을 이끄는 리더를 선정해 공개하는 ‘권위 있는 리스트’다. 올해는 방 대표와 함께 존 레이드 ‘라이브네이션유럽 대표, 스투 벌겐 워너뮤직그룹 대표 등 세계 음악계를 이끄는 유명 인사들이 선정됐다.
빌보드는 방 대표에 관해 “방탄소년단을 빌보드아티스트100과 빌보드200 차트 1위에 올려놓았고 '러브 유어셀프:스피크 유어셀프' 스타디움 투어를 매진시킨 지휘자"로 소개했다.
방 대표는 빌보드 매거진를 통해 "지난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9월 24일 방탄소년단의 UN 스피치"라며 "방탄소년단은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했으며 이는 가수의 삶 자체가 퍼포먼스이자 메시지가 된 상징적인 사건으로 세계 청소년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톱클래스》에 따르면, 방 대표가 음악에 처음 눈뜬 건 중학교 때였다. 아버지가 사준 기타를 접하면서 음악에 빠졌고, 밴드를 결성해 이때부터 직접 곡을 썼다. 고등학교 때는 입시 준비로 잠시 음악에서 멀어졌다가 대학 들어가서 작곡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94년 제6회 유재하가요제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프로듀서로서는 비 ‘나쁜 남자’, 백지영 ‘총 맞은 것처럼’ ‘내 귀에 캔디’, 다비치 ‘시간아 멈춰라’, 2AM ‘죽어도 못 보내’ 등의 히트곡을 썼다.
프로듀서의 길을 열어준 건 박진영 JYP 대표라고 한다. 방시혁은 1997년 박진영이 설립한 연예기획사(JYP의 전신)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프로듀서의 길을 걸었다. 그는 “프로듀서의 모든 것을 진영이 형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여전하다. 음악적인 협업은 물론 인간적인 유대도 여전하다. BTS가 처음 빌보드에서 수상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통화한 사람도 박진영이었다.
방시혁 대표는 언론 인터뷰나 공개적 강연 자리에서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해 ‘분노’와 ‘불만’이라고 말해왔다. 2019년 2월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꿈은 없지만 불만이 엄청 많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음악 비즈니스의 불공정 거래 관행 등에 대해 분노하고 싸우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했다. 2005년, 그의 나이 서른셋에 설립한 빅히트엔터테이먼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자 무대였다고 한다. 기존 관행에 타협하지 않고, 산업적으로 의미 있는 음악 생태계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그에게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갖게 했다.
‘자발성’을 강조한 방탄소년단도 이런 시선의 산물이다. 모든 곡을 멤버 스스로 작사·작곡 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음악에 녹여내는 아이돌, 화려한 무대 뒤 잠에서 깬 부스스한 일상을 낱낱이 공개하는 아이돌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1년 후, 3년 후를 내다본 긴 호흡의 서사를 지닌 음악적 앨범은 처음이었다. 각각의 앨범이 독자적인 완성도를 가지면서도 앞뒤로 유기적 관계를 갖는 아이돌 앨범도 처음이었다. 이 모든 것은 방시혁 대표의 빅 피처 안에서 가능했다.
방시혁은 2011년 4월 서울대 ‘언론정보문화 포럼시리즈’ 강연에서 “이제는 노래와 춤, 연기는 물론 연주와 작곡까지 겸하는 뮤지션돌이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아이돌’이 아닌 ‘뮤지션돌’의 등장을 예고한 셈이다. 2년 후 2013년 6월 13일, 기존에 없던 7인의 방탄소년단(BTS)이 등장했다. 그런데 방탄소년단은 머나먼 별에서 반짝이는 ‘스타’가 아닌 ‘우리 시대의 친구들’이었다. 또래와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내 곁의 스타’, 탄탄한 음악적 실력에 노래나 춤은 말할 것도 없고 SNS를 통해 공개되는 일상 속 인성까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스타로 대중 앞에 섰다.
방시혁 대표는 ‘방탄소년단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아티스트란 누군가가 창조하는 것이 아닌데 내가 아버지라고 불리는 순간 방탄소년단이 객체가 된다"는 게 이유다. 그렇다면 그는 현장의 중심에 직접 서서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내는 ‘창조적 아티스트’ 계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