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게 된다면 34번방에 들러 꼭 터너의 작품 앞에 앉아있어 보자. 어쩜 어디선가 당신이 가진 당신만의 무기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올지도 모르니까."
제임스 본드는 어찌어찌하여 달리는 기차 위에서 나쁜 놈과 격렬하게 몸싸움을 하다가 자기편이 쏜 총에 맞아 강으로 떨어진다. 자신의 대사처럼 '부활이 취미’이었던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본드지만 나쁜 놈과 자신이 뒤엉켜 있는 상태에서 발포를 명령한 상관 M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이름 모를 섬에서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을 마시러 들어간 한 Pub에서 자신의 본부 MI6에 가해진 폭탄테러와 해킹 사건이 방송되는 것을 보고는 다시 귀환한다. 본드는 첩보원으로 복귀하기 위해 테스트를 치르지만 이미 버려질 데로 버려진 몸! 합격점수인 70점에 한참 못 미치는 40점을 얻었으나 상관 M은 아슬아슬하게 테스트에 통과했다고 통보하며 복귀 후 첫 번째 임무를 맡긴다.
   
2012년 개봉한 007 스카이폴 이야기다.
    
임무를 위해 위조 여권과 항공권을 받아야 했던 본드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접선자를 기다린다. 지금부터가 오늘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 글의 주인공은 제임스 본드와 그가 보고 있던 그림, 이렇게 공동 주연이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본드에게 다가오는 한 남자. 하고 많은 자리 중에 본드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려 하자 본드는 의아한 듯 바라보고,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젊은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스러져가는 ‘전함(戰艦) 테르메르’를 바라보며 마치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한 제임스 본드.
   
Q: 이 그림은 항상 저를 멜랑콜리하게 해요. 거대한 전함도 세월이 지나면 쓰레기가 되죠. 시간은 거스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뭐가 보이나요?
 
본드: 거대한 전함이오. 실례하겠습니다.
  
Q: (귀찮다는 듯 일어나 자리를 옮기려는 본드를 향해) 007! 제가 새로 온 쿼터 마스터예요.
 
본드: 농담이죠?
  
Q: 왜요? 연구실 가운 안 입고 있어서요?
  
본드: 아직 포크 스푼이 필요해 보이는데...
  
Q: 제 복잡함은 설명하기 어려워요.
  
본드: 그게 자랑인가?
  
Q: 나이는 더 이상 효율성의 증명이 되지 못하죠.
  
본드:  그리고 더 이상 젊음은 혁신의 증명이 아니지...
    
 
나이와 경험이 더 이상 효율적이지 못하다며 한 방 먹이는 Q에게 본드는 젊음이 혁신의 증명은 아니라며 라임 살려 반격하지만 이미 자신이 어쩜 뒷방 늙은이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림, 원 샷으로 클로즈업까지 된 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라는 작품이다. 원제는 ‘Fighting Temeraire’인데 한국어 번역으로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혹은 ‘해체를 위해 예인 된 전함 테메레르’라고도 한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34번방의 영구 전시작품이다.
     
한 편의 그림이 스토리 맥락의 해석을 이렇게도 풍부하게 할 수 있다니, 샘 멘데스 감독 연출, 다니엘 크레이그의 연기, 그리고 윌리엄 터너의 그림, 이 조합을 보고 나는 "예술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는 1838년 템스 강가에서 전함 테메레르가 증기선에 이끌려 선박 해체장으로 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 그림을 그렸다. 윌러엄 터너는 우리에겐 그리 알려지지 않은 화가지만 2020년부터 사용하게 될 영국의 20파운드 지폐엔 그림 ‘전함 테메레르’와 윌리엄 터너의 초상이 들어있다고 한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스페인 연합군에 맞섰던 트라팔가 해전(海戰)에서 승리함으로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당시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탑승한 빅토리호는 3층짜리 목조 군함으로 승무원 850명이 승선하여 4개월 동안 해상에서 체류 가능하고, 3년간 쓸 수 있는 화약과 포탄 적재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전 중 빅토리호가 나폴레옹 군에게 수류탄 공세로 밀리고 설상가상으로 넬슨 제독이 저격당했을 때 빅토리호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 바로 테메레르호다.
    
덕분에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연합 함대는 23척의 전함 중 20척이 격침당했으나 영국 함대는 1대의 손실도 없었다고 한다. 자칫 빅토리호의 격침으로 역사가 뒤바뀔 뻔했지만 종국엔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을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바로 테메레르호인 것이다. 테메레르 전함의 최후가 더 애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Fighting Temeraire(전함 테메레르)', 윌리암 터너, 0.91x1.22m, 1838~1839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역사의 중심에서 존재감을 떨쳤을 테메레르. 하지만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범선은 시대의 변화를 증명하는 작은 증기선에 이끌려 해체되기 위한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제임스 본드의 얼굴엔 고통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살짝 스쳐 지나간다. 조직에서 버림받고 죽을 뻔한 본드. 복귀했지만 여전히 은퇴를 종용당하며 자신을 늙은 개라고 부르는 나쁜 놈들을 물리쳐야 하지만 예전같이 '볼펜 폭탄'같은 첨단 무기는 고사하고 총 한 자루와 위치 수신기 하나만 들고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조직에서의 리더들도 본드와 같은 처지가 아닐까? 소위 한 때 잘 나가던 나였는데 어느새 나이를 먹고 원하건 원치 않건 리더라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걷고 있는 사람들. IT로 무장한 새파란 것들은 리더가 한 마디라도 할라치면 꼰대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냥 지들 편한 대로 하라고 놓아두면 무능하다는 딱지를 붙인다. 테메레르가 해체되기 위해 견인되어가듯, 10년 안팎이면 조직의 중심 자리를 넘겨주고 사회의 주류에서 해체될 상황에 놓인 리더들. 그나마 10년 동안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터.
     
많은 리더들은 아마도 '내가 과연 무엇을 해놓았나?' '남은 시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두 개의 질문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을 것이다.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이란 자문으로 시작된 내 나이 50은 그것이 하루아침에 깨달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더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터너의 그림이, 그 그림을 보는 본드의 마음이 더 애달프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윌리엄 터너가 ‘전함 테메레르’를 그린 것은 그의 나이 60이 되어서다. 어쩜 그도 본드 그리고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런 그림을 그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예인(曳引)되던 테메레르호는 그림에서처럼 웅장하게 돛을 세우고 있지 않았고 과거의 영광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낡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테메레르를 견인하는 작은 증기선도 한 척이 아닌 두 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터너는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더욱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하였고 그 그림은 영국인들이 아니 나아가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그림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수채화에 탁월했던 터너는 유화마저도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맑게 그려냈다. 젊은 시절의 그림에 비해 훨씬 자유스럽고 흐트러진 붓 터치는 수채화의 기법과 맞닿아 장엄하지만 무겁지 않게, 자연스럽게 진심이 투영된 작품을 만들어 냈다. 비로소 삶의 한 조각을 원하는 모습으로 남길 수 있는 나이, ‘전함 테메레르’를 터너가 20~30대에 그렸다면 지금과 같은 감동이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수많은 갈등과 선택, 가끔의 작은 성공과 수많은 커다란 실패들을 겪어낸 리더들이 지금이라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지천명의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찾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둘째,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본드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한 무기는 다른 007 시리즈처럼 비까번쩍한 최첨단 무기들이 아니었다. 젊디젊은 쿼터 마스터 Q가 본드에게 전해준 것은 총자루에 초정밀 센서가 있어 본드만 쏠 수 있는 작은 총 한 자루였고, 그가 몰았던 차는 1964년 영화 007 골드핑거에 처음 등장한 애스턴 마틴 DB5였다.
    
본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신만의 무기, 그리고 오래되었지만 007의 전통을 상징하는 자동차, 그리고 어떤 위기의 상황이 와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몸에 밴 직감 그리고 무의식적 반사신경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본드. 결국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은 조직의 리더들 또한 자신의 경험과 직감을 믿고 자신만의 무기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4년 처음 등장한  애스턴 마틴 DB5(사진 위)와 본드의 손에서만 작동하는 총.
 
  
분야별 요원들의 정보를 제공받아 그것을 취합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정에 자신과 조직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본드와 이 시대 조직에서 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또 다른 본드들이여!
    
우리들의 청춘과 용맹함은 마치 전함 테메레르와 같았고 언젠가 우리는 석양이 지듯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지겠지만 테메레르를 찬양한 터너와 같이, 본드를 바라보며 손뼉 치는 관람객같이, 이 시대의 수많은 리더들이 만들어놓은 터전 위에서 또 다른 역사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또 다른 터전이 되어줄 것이다.
     
리더의 자리에 있어보니 이렇게 나이를 먹다 보니 조급하다 그리고 불안하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나이에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
이 나이에만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
이것이 삶이 우리에게 내어준 숙제가 아니고 무엇일까?
    
만약 당신이 '리더'라는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그리고 어느 날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게 된다면 34번방에 들러 꼭 터너의 작품 앞에 앉아있어 보자. 어쩜 어디선가 당신이 가진 당신만의 무기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올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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