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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서울 서초구 해양빌딩 3층에서 열린 '청년한국' 세미나에서 염돈재 전 국정원 1차장이 '독일 통일을 알면 북한 핵이 보인다'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김성훈 기자 |
2월 14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서초구 해양빌딩 3층 강연장에서 국정원 1차장 및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원장을 역임한 염돈재 교수의 '독일 통일을 알면 북한 핵이 보인다'는 강연이 열렸다.
이날 강연은 청년 지도자 양성 단체인 '청년한국'이 주최했으며,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명사들을 초청해 한국 근현대사, 북한 인권, 국제 정세, 안보 등의 내용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는 황교안 전 총리가 강연자로 서기도 했다. 강연장에는 6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해 강의장을 가득 채웠으며, 강의 후 질문들도 쏟아져 나와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염돈재 교수는 "독일의 통일 여건은 좋지 않았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염 교수는 1990년 독일통일 직전부터 3년간 주독일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면서 독일 통일 현장을 직접 지켜봤으며, 2010년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이란 책을 발간한 독일 통일 분야의 전문가다.
독일의 통일 여건
동독은 1988년 1인당 GDP가 9700 달러에 달했고 세계 11대 공업국에 속했던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였다. 또 동독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강하지 않았고 비밀경찰 슈타지(Stasi)의 철저한 감시(주민 62명 당 정보요원 1명) 아래 정치적으로도 안정돼 있었다.
서독인들의 통일 의식은 미약했다. 1980년대 후반 여론 조사에서 통일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서독 국민은 0.5%에 그쳤고 통일 가능성을 믿는 국민은 3%뿐이었다. 서독 내에서 공산혁명가를 흠모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좌파 지식인들은 동독을 미화하고 있었다.
또 당시 독일은 동독과 서독이 설령 합의한다 하더라도 통일을 이룰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을 분할 통치하고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전승 4국의 동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독일로부터 침략 당한 역사를 가진 영국, 프랑스는 소련과 함께 독일 통일에 찬성하지 않았다. 독일 통일이 얼마나 요원했는지 동방 정책을 펼쳤던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조차도 "통일은 평생의 망상"이란 말을 남겼다.
염돈재 교수가 독일 통일 당시 우리 언론의 보도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김성훈 기자 |
독일의 통일 과정
"그렇다면 독일은 어떻게 통일을 이뤘을까?" 염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독일 통일의 과정을 요약하면 첫째, 동독 주민의 시위로 공산정권이 붕괴 됐고, 둘째, 자유선거에서 동독 주민이 서독 편입을 선택했으며, 셋째, 서독 정부가 기민한 외교로 전승국의 동의를 확보함에 따라 동서독의 통일이 기적적으로 이뤄지게 됐다.
먼저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동독보다 앞서 자유화의 물결이 파도쳤던 헝가리가 1989년 5월 국경을 개방했다. 자유 세계로의 탈출을 꿈꿨던 동독 주민들은 매일 2000명 씩 헝가리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고 서독은 이들을 전부 수용해줬다.
동독 내에서 자유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동독 시민들은 공산정권을 규탄하는 촛불 시위를 열었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였던 고르바초프는 동독의 개혁을 촉구했고 시위자에 대한 유혈진압에 반대했다. 촛불 시위는 급속히 확산됐고 위기감을 느낀 동독 호네커 서기장은 돌연 사임했다.
급기야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고 4달 간 34만 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후 공산정권은 붕괴됐고 동독 내 자유선거가 치뤄지게 됐다. 흥미롭게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독 공보관의 말 실수로 일어났다. 공보관은 동독 주민의 여행 자유를 확대한다는 내용의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오늘 부로 베를린 장벽을 통한 여행의 전면 자유화가 이뤄졌다고 잘못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독 주민들은 즉각 베를린 장벽의 국경 통과소로 몰려 들었고 수많은 인파에 두려움을 느낀 국경 경비대는 국경의 문을 열게 됐다. 이 사건이 발단이 돼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고 독일 통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동독 자유선거에선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승리했고 1990년 4월 12일 동독 민주정부가 출범했다. 새롭게 새워진 민주정부는 신속한 통일을 추진했고 같은 해 7월 1일 '동서독 화폐·경제·사회 통합조약' 발효, 8월 30일 '통일조약' 체결, 10월 3일 통일로 이어지게 됐다.
동독 내 자유화의 움직임과 동시에 서독 또한 기민한 외교로 전승 4국의 통일에 대한 동의를 확보해 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헬무트 콜 당시 총리는 통일 의지를 명확히 천명했고 통일 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잔류할 것을 약속하면서 미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미국은 서독 편에 서서 영국, 프랑스를 설득했고 소련을 회유하고 압박해 동의를 끌어내는 데 조력했다.
독일 통일의 성공 배경
염 교수는 독일 통일이 성공할 수 있었던 두 주역으로 동독 주민과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를 꼽았다. 동독 주민들이 공산 정권의 붕괴를 위해 내부에서 투쟁했고 콜 서독 총리가 기민한 외교 활동을 통해 승전 4국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 독일 통일에 가장 주효했다는 평가다.
염 교수는 독일 통일이 성공할 수 있었던 단기적·직접적 요인으로 다섯 가지를 꼽았다. 첫째, 소련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며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었고, 둘째,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등 주변 공산국들이 탈 공산화 혁명에 성공했으며, 셋째, 동독 경제가 파탄 상태로 가며 통일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넷째, 콜 서독 총리의 적극적인 의지와 치밀한 대응, 끝으로 미국의 적극적 지원이 있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독일 통일 성공의 장기적·간접적 요인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이 서독을 동경 대상으로 삼도록 했고, 둘째, 친미·친서방 정책, 대가 없는 지원 불가 방침 등 원칙을 고수한 서독 정부의 내독정책이 통일의 문을 여는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셋째,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고, 넷째, 철저한 과거 청산으로 주변국의 신뢰를 확보했으며, 다섯째, 동독 주민의 서독 TV 시청이 가능했던 점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염돈재 교수가 독일통일의 주역이 됐던 인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성훈 기자 |
잘못 알려진 독일 통일
염 교수는 "우린 독일 통일을 이야기할 때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만 강조하는데, 이는 독일 통일에 관해 부분적으로만 아는 것"이라 지적하며 독일 통일에 관해 잘못 알려진 정보를 바로잡았다.
염 교수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외에도 서독 초대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와 통일을 이룬 총리인 헬무트 콜을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소개했다. 아데나워 전 총리가 세웠던 '힘의 우위 정책'의 기조가 헬무트 콜 전 총리에게로 계승되면서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 및 서독 주도의 통일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우리가 브란트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이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한국의 '햇볕정책'과 노선을 같이 하는 정책이었다"며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분단 고통 완화와 민족 동질성 유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브란트 정책은 소련·동독과 화해·협력하고 동독의 안정을 도우면 공산 정권이 변해 통일이 된다는 정책이었다.
염 교수는 브란트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며 "독일 통일은 서독의 접근 정책으로 동독 공산 정권이 변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동독 주민의 시위로 망해서 가능해 진 것"임을 강조했다.
이어 브란트의 동방 정책보다는 아데나워의 힘의 우위 정책이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힘의 우위 정책은 '자석 이론'으로도 불리는데 서독이 정치, 경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동독을 끌어당겨 흡수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정책이었다. 서독은 힘의 우위 정책 하에서 소련이 제시한 중립화 유혹을 거부하고 친미·친서방 정책을 밀어붙였다. 동독 경제 지원 시에도 3원칙('먼저 요구 시', '반드시 대가를 받고', '동독 주민들이 알게')을 고수했다.
그는 "독일은 경제 지원이 공산 정권을 강화시킬 것을 경계해 3원칙이 충족되지 않은 무상지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며 "우리 정부는 무조건적으로 대북 지원하려 할 것이 아니라 서독의 통일 정책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어 "흡수통일에 반대하는 이들은 독일이 흡수통일 후 심각한 휴유증을 겪었다고 주장하지만 오늘날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됐다"며 흡수통일은 기피해야 할 통일 모델이 아님을 강조했다.
독일 통일이 주는 시사점
염 교수는 "통일 비용의 지출은 20년이지만 통일의 혜택은 영원할 것"이라며 한반도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는 통일이 가져올 유익과 우리 민족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분단비용 절약, 경제규모 확대, 저렴한 산업 용지, 새로운 일자리, 대륙 진출, 물류비 절감, 북한·러시아·몽골의 자원 활용, 관광 자원 개발, 우리 국민의 역동성 등 세부항목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
염 교수는 "핵을 만들고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의 경제 발전을 돕는 것은 옳지 않다"며 "민족 화합, 통일 휴유증 예방을 위해 북한 경제를 일으켜 세운 후 천천히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경제 발전 시 북한 3대 세습 체제는 더욱 통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염 교수는 "북핵은 북한 3대 세습 체제의 유일한 업적이자 자산으로 세습 체제의 존립, 적화통일, 경제 회생을 위한 유일한 희망의 근거로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은 이후 강온 전술 배합으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피로감을 유도하고 기존 핵을 일부 폐기하는 조건으로 제재 해제를 요구하며 미북관계 개선에 나설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의 목표는 결국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실현이라는 것이다.
염 교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릴 제2차 미북 정상회담을 전망하며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은 희박하고 비핵화 이행도 지연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미북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나오고 주한미군이 감축되며 대북 지원이 재개될 것을 우려했다.
염 교수는 강의를 마치며 "노(老) 교수는 나라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다"며 "국민들이 국가 위기의 실상을 깨닫고 목소리를 내고 움직여야 할 때다. 독일 통일이 주는 교훈을 기억하고 한반도의 자유 통일을 위해 힘을 모아달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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